시중공파 현조약기에는 총 2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승길(承吉) ? ∼ ? 파명:시중공(侍中公)
 조선 개국초의 문신으로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시중공의 8세손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 하(賀)의 아들이다. 고려말 혁명시기를 당하여 고향에 은거하며 의롭게 행세하니 향리 사람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태조고황제가 대장군(大將軍)으로 황산(荒山)에서 왜장을 정벌하고 전주 오목대(梧木臺)에 머물면서 고향에 남아 있는 종친들의 안부를 물을 때 공이 그 자리에 참석하여 영접하였다. 태조고황제가 개국한 후 공은 백의(白衣)로 입시하여, 특명으로 이조판서에 이르러 직분을 다하였다. 그러나 공은 벼슬과 명망이 높은 것을 두렵게 여겨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전주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공의 깨끗한 처세와 시종에 있어 명덕(名德)이 크게 뛰어남이 있었을 것이나 그 유문일사(遺聞逸事)를 상고할 수 없고 심지어는 공의 표덕(表德) 배위(配位) 생졸(生卒) 향년(享年)까지도 전하지 않으니 개탄할 일이다.
이(이) 1355∼1409 파명:시중공(侍中公)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자는 이지(之), 호는 남촌(南村), 시호는 문희(文僖). 시중공의 9세손이며 문헌공 자을(資乙)의 아들이다.
1372년(공민왕 21)에 성균시에 합격, 태학에 들어갔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이며 1377년(우왕 3)에 음(蔭)으로써 사온감(司춠監) 부직장(副直長)을 제수받고 누천하여 1390년(공양왕 1) 삼사 판관(三司 判官)이 되었다. 이해 5월에 윤이(尹츺) 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과 목은(牧隱) 이하 10여 인이 청주옥에 계류되었다가 방환되었다. 1391년(공양왕 2)에 예조총랑(禮曹摠郞)으로 특진한 후 공이 양친(養親)할 것을 청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주에 돌아갔다. 1392년(태조 1)에 태조고황제가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394년(태조 3)에 충주목사를 특배받고 호조참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1404년(태종 4) 자헌대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특진하였다. 1406년(태종 6) 말 정헌대부 이조판서를 배수받고 다음 해 숭정대부에 올랐다.
1372년(공민왕 21)에 성균시에 합격, 태학에 들어갔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이며 1377년(우왕 3)에 음(蔭)으로써 사온감(司춠監) 부직장(副直長)을 제수받고 누천하여 1390년(공양왕 1) 삼사 판관(三司 判官)이 되었다. 이해 5월에 윤이(尹츺) 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과 목은(牧隱) 이하 10여 인이 청주옥에 계류되었다가 방환되었다. 1391년(공양왕 2)에 예조총랑(禮曹摠郞)으로 특진한 후 공이 양친(養親)할 것을 청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주에 돌아갔다. 1392년(태조 1)에 태조고황제가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394년(태조 3)에 충주목사를 특배받고 호조참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1404년(태종 4) 자헌대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특진하였다. 1406년(태종 6) 말 정헌대부 이조판서를 배수받고 다음 해 숭정대부에 올랐다.
익달(益達) 1614∼1667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자겸(子兼). 문정공 승길의 11세손이며 선무랑(宣務郞) 영길(英吉)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좌랑(佐郞) 정숙주(鄭叔周)와 삼례역(三禮驛)에 모여 창의(倡義)하려다가 화의가 이루어짐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갔다. 무과에 장원하여 영의정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효종대왕에게 추천하여 영유현령(永柔縣令)을 시키니 상소하여 숭검(崇儉) 이재(理財) 양병(養兵) 복수(復讐)의 대의(大義)를 말하였다. 1656년(효종 7) 전라우수군절도사를 역임하고 1664년(현종 5) 영흥대도호부사를 제수받았다. 공은 문장에도 뛰어나며 재능과 도량이 넓고 컸다고 한다.
자을(資乙) 1324∼1400 파명:시중공(侍中公)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이며 명신이다. 자는 원거(元擧), 호는 회은(晦隱), 사호(賜號)는 빈정(彬庭). 시중공의 8세손이며 선부상서(選部尙書) 윤(胤)의 3남이며 문하평리(門下評理) 귀을(歸乙)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롭고 도리에 밝았다고 한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인으로 1342년(충혜왕복위 3)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다음 해 연달아 19세에 문과 장원급제하니 가정(稼亭) 선생이 `완산도중(完山途中)\'이란 시를 지어 격찬하였다. 1343년(충혜왕복위 4) 춘추관 수찬이 되고 도첨의사사 녹사(都僉議使司錄事) 좌사보(左思補) 예문관 응교 등을 거쳐 1352년(공민왕 1)에 한림원 시강학사 내지제고(侍講學士 內知制誥)가 되어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경사(經史)를 진강(進講)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전임되고 예부총랑(禮部摠郞) 좌대언(左代言)을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나주목사로 나가 백성을 구제하며 교화하여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여 생업을 안정케 하니 세상 사람들이 공을 칭송하되 “정사(政事)를 함에 대본(大本)을 안다.” 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단성절의찬화공신(端誠節義贊化功臣)이 되었다. 1365년(공민왕 14) 봄에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어 신돈(辛旽)이 왕총(王寵)을 의지하여 교만 방자함을 상소하여 “돈(旽)은 단인(端人)이 아니라 장차 국가의 대환(大患)이 될 것이오니 기변(機變)을 막으소서.” 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주 자만동(滋滿洞) 발산 아래 남천(南川)변에 별서(別墅)를 짓고 왕언방(王彦方)의 의행(義行)을 우러러 `군자당(君子堂)\'이라 이름하고 효제충신의 도를 강론하였다. 신돈이 패한 후 공민왕이 “내가 자을의 명석한 선견을 쓰지 않았음을 한한다(予恨不用資乙先見之明也).”하며 불렀으나 공이 상소하여 사퇴하였다. 1392년(조선 태조 1) 7월에 태조고황제가 즉위한 후 공이 향리에 은거하고 있음을 듣고 여러번 벼슬을 내리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394년(태조 3) 가을 세자가례(世子嘉禮 : 세자 芳碩의 嬪은 전주에 世居하는 沈孝生의 딸이었음)를 진하(進賀)하는 잔치에서 임금은 공을 종로(宗老)가 된다고 해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검교령삼사사(檢校領三司事)를 특명한 후 사연(賜宴)하고 술을 친히 권하며 이르기를 “천 가지 나무도 뿌리는 하나이고, 만 갈래 흐르는 물도 근원은 하나이니, 오늘의 즐거운 모임은 다만 군신의 자리로 말고 종친의 정의로 마심이 가하다(千枝一根 萬流同源 今日之樂 勿有君臣之分 只爲宗族之誼 飮之可也).” 하였다. 1395년(태조 4) 예문관 대제학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領經筵事監春秋퉓事 世子傅)를 제수하고 교지를 내리며 “경의 학력에 힘입어 조정이 빛나고 성대하오.” 하고 `빈정(彬庭)\'이란 호를 하사하였다. 1398년(태조 7) 8월에 태조고황제가 양위할 뜻이 있어 대신들에게 문의하니 모두 대답하지 못하자 공이 선뜻 아뢰기를 “장자로서 후사를 삼아야 천명을 이어 인심이 따를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이를 소중히 여기소서.” 하였다. 태조고황제는 마침내 책명(策命)하여 영안군(永安君)을 세자로 삼고 내선(內禪 : 임금이 왕세자에게 양위는 하였으나 아직 즉위의 예를 올리지 않은 것)하였다. 공이 사직하고 물러감을 청하니 태조고황제가 윤허하고 궤장(?杖)과 어사의(御蓑衣)를 하사하였다. 1400년(정종 2) 노환으로 77세에 별세하자 정종대왕이 애도하여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대언(代言 : 承旨)을 보내 조제(弔祭)하고 `문헌(文憲)\'이라 시호를 내렸다.
존화(存華) 1914∼1964 파명:시중공(侍中公)
 초명은 존환(存煥), 호는 백촌(白村). 전북 완주군 비봉면 이전리 출신으로 양후공 백유(伯由)의 18세손이며 평호(平鎬)의 아들이다. 일찍이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청년시절 향리에서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왜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으로 건너가 봉천학원 전문부 법과(奉天學院 專門部 法科)를 졸업하고 그곳 독립지사들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환국하였다. 귀국 후 리승만 박사의 정치 노선에 동참하여 국민회 완주군 지부장 · 자유당 완주군 위원장 · 전국민중자결 시군대표자대회 부회장 · 자유당 전북도당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1954년 완주군(갑구)에서 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58년에 4대 민의원에 재선되어 민의원 문교분과위원장 · 인천상륙작전 기념위원회 위원장 · 한중협회 상무이사 · 국군전몰장병묘비건립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자유당 중앙조직위원장으로서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 부통령 선거를 주도하여 리승만 박사와 리기붕씨를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 관료들의 부정과 폭력에 의한 3·15 부정선거가 발단이 되어 청년 학도들에 의한 4·19 혁명이 일어난 후 리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자유당 중진들은 투옥되어 공은 15년형을 받았으나 1963년 특사로 출옥된 후 병이 심해져 다음 해 50세로 별세하였다. 공은 평소 청렴결백한 정치생활을 하였으며 항상 민족화합과 남북통일을 주창하였다. 1993년 공의 유덕을 기리는 리재규(李再圭) 등 여러 인사들이 청렴비(淸廉碑)를 세워 추념하고 있다.
중길(重吉) 1576∼1646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서백(瑞伯). 문정공(文正公) 승길(承吉)의 10세손이며 병조참판 원립(元立)의 아들이다. 1614년(광해군 6)에 무과 급제하고 1620년(광해군 12) 동하사(同賀使)에 나아갔다. 자주 진급하여 1639년(인조 17)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오위도총부 오위장 겸 내금위장을 역임하였다.
지익(之益) 1622∼1661 파명:시중공(侍中公)
 호는 죽오(竹塢). 문정공(文正公) 승길(承吉)의 11세손이며 진사 겸()의 아들이다. 부모께 정성을 다하는 효심은 타고난 천성으로 친상을 당함에 여묘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심원(深遠)하고 경사(經史)를 널리 통달 하였으며 말년에 예학(禮學)에 힘쓰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였다. 공이 40세에 별세하니 주민(州民)이 다 눈물을 흘리고 파시(罷市)하고 송우암(宋尤菴) · 송동춘(宋同春) 양 선생이 분개하여 말하되 “동방의 일현(一賢)이 불행히도 단명하다.”고 하였다.
목산(木山) 이기경(李基敬)이 행장을 짓되 “일향지 안자(一鄕之 顔子).”라 하였으며 전주 오대사(梧臺祠)에 향사(享祀)했다.
목산(木山) 이기경(李基敬)이 행장을 짓되 “일향지 안자(一鄕之 顔子).”라 하였으며 전주 오대사(梧臺祠)에 향사(享祀)했다.
질(질) 1374∼1433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성리(聖理), 초명은 질( ), 호는 임천(林川). 시중공의 10세손으로 문헌공 자을의 손자이며 문희공 이()의 아들이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1390년(공양왕 1)에 사마시 합격, 1396년(태조 5) 음(蔭)으로 교서관 정자(校書館 正字)에 보직되었고 누천하여 1404년(태종 4) 남대 장령(南臺 掌令)으로 발탁되었다. 예문관 응교 겸 시강원 필선을 거쳐 1410년(태종 10)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고, 1419년(세종 1) 통정대부에 올라 성천도호부사로 나아갔다.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동지돈녕부사를 거쳐 한성부윤을 역임하였다. 1433년(세종 15)에 전주 사제에서 별세하니 자헌대부 판한성부사 홍문관 대제학 동지 성균관사로 증직되고 `경헌(景獻)\'이란 시호를 받았다.
철(鐵) 1540∼1604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강중(剛中). 관찰사 세장(世璋)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가 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에 호종하고 돌아와 양양부사에 올랐다. 1594년(선조 27) 지평 · 장령 등을 거쳐 이듬해 수찬을 지내고, 1596년(선조 29) 집의 · 동부승지 · 좌부승지를 역임하고, 1598년(선조 31) 형조참의, 다음 해 호조참의 우승지를 지냈다. 1603년(선조 36) 예조참의로 사은 겸 천추사(謝恩兼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철상(喆相) 1919∼1995 파명:시중공(侍中公)
 호는 송은(松隱). 문정공의 21세손이며 석한(錫漢)의 아들이고 전주시의 전 민선시장 주상의 동생이다. 그의 아버지 석한은 영재육성의 뜻을 가지고 학교부지로 전토를 기부하여 전주영생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철상은 전주신흥중학교와 고창고보를 졸업하고 1940년 경성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였다. 귀향하여 전라북도청과 전북교육위원회를 거쳐 전주박물관장 · 전주간호전문대학 등에서 공직생활을 한 후 대통령포상을 받고 정년퇴임하였다. 대한체육회 임원과 88올림픽추진위원 · 전북체육동우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평생을 국민체육발전에 봉사하여 전주시민의 상을 비롯 10여 회의 체육공로상을 받았다. 또한 공은 숭조돈종(崇祖惇宗)의 뜻을 가지고 전주리씨 시중공파종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으로 종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공은 서도에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으며 사람을 대하면 소탈한 마음으로 간격을 두지 않았으며 남의 과실을 들으면 덕량으로 소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