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군파 4세 약사에는 총 2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익녕군(益寧君) 1682∼1727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제(梯), 자는 운로(雲路).
인흥군의 증손이며 전성군의 장남으로 현록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한양조씨로 현감 진주(鎭周)의 딸과, 군부인 광주안씨로 만태(萬泰)의 딸이며 묘는 3합폄이다.
인흥군의 증손이며 전성군의 장남으로 현록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한양조씨로 현감 진주(鎭周)의 딸과, 군부인 광주안씨로 만태(萬泰)의 딸이며 묘는 3합폄이다.
익양군(益陽君) 1689∼1728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단(檀), 자는 형지(馨之). 전천군의 계자이며 생부는 전성군이다.
현록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전천군 묘 좌강 축좌이다.
배위는 군부인 남원윤씨로 이철(以哲)의 딸과, 군부인 청송심씨로 필준(必俊)의 딸이며 묘는 3합폄이다.
현록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전천군 묘 좌강 축좌이다.
배위는 군부인 남원윤씨로 이철(以哲)의 딸과, 군부인 청송심씨로 필준(必俊)의 딸이며 묘는 3합폄이다.
인흥군(仁興君) 1604∼1651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영(瑛), 자는 가온(可춡), 호는 취은(醉隱),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선조대왕의 12남이고 어머니는 정빈(靜嬪) 민씨(閔氏)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우수하고 특이하여 선조대왕의 귀여움을 가장 많이 받았으나 5세 때 부왕이 승하하자 어른과 같이 상례(喪禮)를 치르고 7세에 인흥군에 봉해졌다. 광해군은 등극하여 공에게 사부(師傅)를 두지 못하게 하니 친형인 인성군(仁城君)에게서 사사로이 <소학>과 <대학> 등을 배웠다. 또한 공이 장성했으나 광해군이 혼례의 명을 내리지 않아 어머니 정빈 민씨가 생병이 났으나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20세가 되어서야 혼례를 치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가 난리가 평정된 뒤에 돌아왔고, 1626년(인조 4)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자 식음을 전폐하고 간호했으나 이듬해 모친상을 당했다. 그 해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왕비를 호위하고 강화로 피난갔다가 돌아왔다. 1632년(인조 10) 인목대비가 승하했을 때에는 공이 너무 수척하여 임금이 약을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고 3년상을 치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위했고, 후에 종부시 · 종친부 · 사옹원의 사무도 관장했다. 1649년(인조 27) 인조대왕이 승하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모셨고 이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외국에 가서 진력한 후 병이 더하여 1651년 11월 25일 향년 48세로 영면했다. 공은 인조 · 효종 양조를 섬기면서 검약하기로 유명하여 문전이 항상 쓸쓸했으며 문학을 좋아하여 효종대왕이 심양에 인질로 잡혀있을 때 보내준 시를 표구하여 족자로 만들어 항상 완상(琓賞)하며 가보로 삼았다. 저서에 <월창야화(月窓野話)>가 있다.
배위는 여산군부인 여산송씨로 군수 희업(熙業)의 딸로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의 현손녀이다. 2남 3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탑동 간좌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우수하고 특이하여 선조대왕의 귀여움을 가장 많이 받았으나 5세 때 부왕이 승하하자 어른과 같이 상례(喪禮)를 치르고 7세에 인흥군에 봉해졌다. 광해군은 등극하여 공에게 사부(師傅)를 두지 못하게 하니 친형인 인성군(仁城君)에게서 사사로이 <소학>과 <대학> 등을 배웠다. 또한 공이 장성했으나 광해군이 혼례의 명을 내리지 않아 어머니 정빈 민씨가 생병이 났으나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20세가 되어서야 혼례를 치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가 난리가 평정된 뒤에 돌아왔고, 1626년(인조 4)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자 식음을 전폐하고 간호했으나 이듬해 모친상을 당했다. 그 해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왕비를 호위하고 강화로 피난갔다가 돌아왔다. 1632년(인조 10) 인목대비가 승하했을 때에는 공이 너무 수척하여 임금이 약을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고 3년상을 치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위했고, 후에 종부시 · 종친부 · 사옹원의 사무도 관장했다. 1649년(인조 27) 인조대왕이 승하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모셨고 이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외국에 가서 진력한 후 병이 더하여 1651년 11월 25일 향년 48세로 영면했다. 공은 인조 · 효종 양조를 섬기면서 검약하기로 유명하여 문전이 항상 쓸쓸했으며 문학을 좋아하여 효종대왕이 심양에 인질로 잡혀있을 때 보내준 시를 표구하여 족자로 만들어 항상 완상(琓賞)하며 가보로 삼았다. 저서에 <월창야화(月窓野話)>가 있다.
배위는 여산군부인 여산송씨로 군수 희업(熙業)의 딸로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의 현손녀이다. 2남 3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탑동 간좌이다.
전계군(全溪君) 1664∼1700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부(溥), 자는 천여(天汝).
낭원군의 3남으로 소의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으며, 현록대부 겸 도총관으로 승계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명덕리 경좌이다.
배위는 증 군부인 상산김씨로 원석(元錫)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낭원군의 3남으로 소의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으며, 현록대부 겸 도총관으로 승계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명덕리 경좌이다.
배위는 증 군부인 상산김씨로 원석(元錫)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전성군(全城君) 1661∼1727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혼(混), 자는 천보(泉甫).
인흥군의 손자이며 낭원군의 차남이다. 1675년(숙종 1) 15세에 부정(副正)을 거쳐 도정(都正)에 오른 후 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왕비) 혼정(魂殿)에 향관(享官) 수행의 공으로 전성군(全城君)에 봉하여졌다. 1683년(숙종 9) 23세에 명성태후(현정왕비) 수릉관(守陵官)이 되어 3년 동안 수릉하면서 가덕대부에 이르렀다. 유덕(綏德) · 흥록(興祿) · 현록(顯祿)에 이르기까지 두번이나 하례(賀禮)를 받고 덕흥대원군 묘(廟)의 직책을 수행한 결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총관(摠管)하여 부제(副提)가 되었으며 주원(?院)의 원사(院事)를 다스려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
종친부 유사(宗親府有司)를 볼 때 종친부를 엄하게 지키는고로 시기를 받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29세때부터 7차례나 연경(燕京)에 사신(使臣)을 가면서 한번은 심양(현 봉천)에 수렵차 나온 청황제와 통역관을 물리고 문자(文字)로 응대(應對)하였다. 또 국경에서는 청나라 관리들의 횡포를 힐문하고 주문(奏文)을 올려 병폐를 고치도록 하였다. 숙종대왕은 동갑 종신인 공을 특별히 사랑하였다. 후에 숙종대왕이 승하하자 경종대왕이 제신을 제치고 특명을 내려 빈소를 받들고 감(좳)을 돌보게 하였다.
노대신으로 궁중을 출입함에 불손함을 보지못하고 책망하니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기상에 굴복하였다.
시인 묵객과 담소하기를 즐겼으며 빈천한 이를 도와주기를 즐겼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남양홍씨로 만조(萬朝)의 딸과, 군부인 청주한씨로 규사(珪퓥)의 딸이고 묘는 3합폄이다.
인흥군의 손자이며 낭원군의 차남이다. 1675년(숙종 1) 15세에 부정(副正)을 거쳐 도정(都正)에 오른 후 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왕비) 혼정(魂殿)에 향관(享官) 수행의 공으로 전성군(全城君)에 봉하여졌다. 1683년(숙종 9) 23세에 명성태후(현정왕비) 수릉관(守陵官)이 되어 3년 동안 수릉하면서 가덕대부에 이르렀다. 유덕(綏德) · 흥록(興祿) · 현록(顯祿)에 이르기까지 두번이나 하례(賀禮)를 받고 덕흥대원군 묘(廟)의 직책을 수행한 결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총관(摠管)하여 부제(副提)가 되었으며 주원(?院)의 원사(院事)를 다스려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
종친부 유사(宗親府有司)를 볼 때 종친부를 엄하게 지키는고로 시기를 받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29세때부터 7차례나 연경(燕京)에 사신(使臣)을 가면서 한번은 심양(현 봉천)에 수렵차 나온 청황제와 통역관을 물리고 문자(文字)로 응대(應對)하였다. 또 국경에서는 청나라 관리들의 횡포를 힐문하고 주문(奏文)을 올려 병폐를 고치도록 하였다. 숙종대왕은 동갑 종신인 공을 특별히 사랑하였다. 후에 숙종대왕이 승하하자 경종대왕이 제신을 제치고 특명을 내려 빈소를 받들고 감(좳)을 돌보게 하였다.
노대신으로 궁중을 출입함에 불손함을 보지못하고 책망하니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기상에 굴복하였다.
시인 묵객과 담소하기를 즐겼으며 빈천한 이를 도와주기를 즐겼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남양홍씨로 만조(萬朝)의 딸과, 군부인 청주한씨로 규사(珪퓥)의 딸이고 묘는 3합폄이다.
전안군(全安君) 1673∼1697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황(潢), 자는 사원(士源).
낭원군의 6남으로 초수는 부정, 소의대부 겸 부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평산신씨로 생원 탁(鐸)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동양군(東陽君) [1703(숙종 29)∼1754(영조 30)]
휘는 당(), 자는 사숙(思叔).
전안군의 계자로 생부는 양원군(楊原君) 희(憘)의 6세손이다. 관례대로 18세에 동양수(守)를 받고 정 · 명의대부(正 · 明義大夫)를 거쳐 28세에 군(君)으로 승진 한뒤 종학(宗學)의 강의에서 장원(壯元)하여 명의대부(明義大夫), 49세에 중의대부(中義大夫), 1752년(영조 28) 50세에 의소세손(懿昭世孫) 수묘관(守墓官)으로 2년 동안 봉직하면서 숭헌대부(崇憲大夫), 승헌(承憲)과 가덕대부(嘉德大夫)로 승진하고 수묘(守墓)를 마친 후 52세에 수덕(綏德)과 흥록대부(興祿大夫)로 승진하였으나 2개월 후 별세하였다.
공의 이러한 공로로 양부 전안군(全安君)에 흥록대부(興祿大夫), 생부 총석(?碩)에 이조참판을 증직하고 생모 남양홍씨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을 내렸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영흥민씨로 진식(震햊)의 딸이며 합폄이고, 군부인 고흥류씨는 정흥(禎興)의 딸, 군부인 언양김씨는 태래(泰來)의 딸이다.
낭원군의 6남으로 초수는 부정, 소의대부 겸 부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평산신씨로 생원 탁(鐸)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동양군(東陽君) [1703(숙종 29)∼1754(영조 30)]
휘는 당(), 자는 사숙(思叔).
전안군의 계자로 생부는 양원군(楊原君) 희(憘)의 6세손이다. 관례대로 18세에 동양수(守)를 받고 정 · 명의대부(正 · 明義大夫)를 거쳐 28세에 군(君)으로 승진 한뒤 종학(宗學)의 강의에서 장원(壯元)하여 명의대부(明義大夫), 49세에 중의대부(中義大夫), 1752년(영조 28) 50세에 의소세손(懿昭世孫) 수묘관(守墓官)으로 2년 동안 봉직하면서 숭헌대부(崇憲大夫), 승헌(承憲)과 가덕대부(嘉德大夫)로 승진하고 수묘(守墓)를 마친 후 52세에 수덕(綏德)과 흥록대부(興祿大夫)로 승진하였으나 2개월 후 별세하였다.
공의 이러한 공로로 양부 전안군(全安君)에 흥록대부(興祿大夫), 생부 총석(?碩)에 이조참판을 증직하고 생모 남양홍씨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을 내렸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영흥민씨로 진식(震햊)의 딸이며 합폄이고, 군부인 고흥류씨는 정흥(禎興)의 딸, 군부인 언양김씨는 태래(泰來)의 딸이다.
전천군(全川君) 1670∼1688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척(滌), 자는 일신(日新).
낭원군의 5남으로 초수는 부정이고, 명선대부에 올랐으며 증 흥록대부 겸 도총관으로 승계 되었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증 군부인 고령신씨로 참봉 우상(遇相)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낭원군의 5남으로 초수는 부정이고, 명선대부에 올랐으며 증 흥록대부 겸 도총관으로 승계 되었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증 군부인 고령신씨로 참봉 우상(遇相)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전평군(全坪君) 1659∼1698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곽(?), 자는 노백(魯伯), 호는 노주(鷺洲). 인흥군의 손자이다. 낭원군의 아들이며 낭선군에게 입양하였다. 처음에 전평부정(全坪副正)에 봉하여졌으나 1679년(숙종 5) 삼조어필(三朝御筆)에 관한 소를 올린 공으로 전평군(全坪君)에 봉하여졌다. 1674년(현종 15) 효경전향관(孝敬殿享官)을 지내고 1676년(숙종 2) 춘전(春殿 : 世子宮) 강(講)에서 상으로 말을 하사받았다. 1680년 보사공신(保社功臣)으로 책록되어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총관(摠官)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1689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이를 반대하는 극간상소(極諫上疏)를 하였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작은 방에 사락당(四樂堂)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고 학문과 풍류를 즐겼다. 또한 그 성품이 청빈하여 평생토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천마(天磨) · 금강(金剛) 등의 명산을 찾아 산수를 즐기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노주집(鷺洲集)>이 있다.
배위는 군부인 밀양박씨로 통덕랑 시위(時瑋)의 딸이다.
묘소는 낭선군 묘하에 있으며 합폄이다.
배위는 군부인 밀양박씨로 통덕랑 시위(時瑋)의 딸이다.
묘소는 낭선군 묘하에 있으며 합폄이다.
청림군(淸林君) 1679∼1698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담(潭).
낭원군의 7남으로 창선대부에 올랐으며 승헌대부에 승계됐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증 현부인 창녕성씨로 하적(夏績)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낭원군의 7남으로 창선대부에 올랐으며 승헌대부에 승계됐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증 현부인 창녕성씨로 하적(夏績)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청양군(淸陽君) 1684∼1725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용(溶).
낭원군의 8남으로 초수는 수(守)이며 창선대부에 이어 승헌대부에 승계됐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현부인 고령신씨로 익증(益澄)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낭원군의 8남으로 초수는 수(守)이며 창선대부에 이어 승헌대부에 승계됐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현부인 고령신씨로 익증(益澄)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