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4세 약사에는 총 3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봉강도정(蓬江都正) 1631∼1681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급(烱伋).
귀천군의 12남으로 처음에 봉강령(蓬江令)으로 제수되었고, 명선대부 봉강도정에 올랐다.
1654년(효종 5) 24세 때 종신들의 전강(殿講)에서 공이 외우고 읽는 것이 자못 정밀하자 임금은 그 왕실의 계파를 묻고 연신(筵臣)들이 “귀천군 충숙공의 아들이라.” 대답하였다. 이에 임금은 묻기를 “그러면 하번한림(下蕃翰林 : 귀천군 충숙공의 손자이며 봉래군의 3남인 장정공을 말함)의 가까운 족속인가?”하자 장정공이 대답하기를 “곧 신의 삼촌입니다.”하였다. 이에 임금이 특별히 공에게 은혜로운 계급을 더하고, 계속하여 충숙공의 절의를 주장하며 말하기를 “이와 같은 종실을 어디서 얻어 왔는가?” 하며 간절히 말하니 이날 모든 신하들이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다.
배위 신부인 칠원윤씨는 현감 대임(大任)의 딸이다.
귀천군의 12남으로 처음에 봉강령(蓬江令)으로 제수되었고, 명선대부 봉강도정에 올랐다.
1654년(효종 5) 24세 때 종신들의 전강(殿講)에서 공이 외우고 읽는 것이 자못 정밀하자 임금은 그 왕실의 계파를 묻고 연신(筵臣)들이 “귀천군 충숙공의 아들이라.” 대답하였다. 이에 임금은 묻기를 “그러면 하번한림(下蕃翰林 : 귀천군 충숙공의 손자이며 봉래군의 3남인 장정공을 말함)의 가까운 족속인가?”하자 장정공이 대답하기를 “곧 신의 삼촌입니다.”하였다. 이에 임금이 특별히 공에게 은혜로운 계급을 더하고, 계속하여 충숙공의 절의를 주장하며 말하기를 “이와 같은 종실을 어디서 얻어 왔는가?” 하며 간절히 말하니 이날 모든 신하들이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다.
배위 신부인 칠원윤씨는 현감 대임(大任)의 딸이다.
봉계도정(蓬溪都正) 1628∼1693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gud건(烱健), 자는 여행(汝行).
귀천군의 11남으로 처음에 봉계령(蓬溪令)으로 제수받았고, 창선대부 봉계도정에 올랐다.
배위 신부인 칠원윤씨(1627∼ ?)는 현감 대형(大亨)의 딸이다.
귀천군의 11남으로 처음에 봉계령(蓬溪令)으로 제수받았고, 창선대부 봉계도정에 올랐다.
배위 신부인 칠원윤씨(1627∼ ?)는 현감 대형(大亨)의 딸이다.
봉래군(蓬萊君) 1593∼1645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윤(烱胤), 자는 여승(汝承), 호는 창주(滄洲). 덕양군의 증손이며 풍산군의 손자로 귀천군의 장남이다.
시서(詩書)에 힘써 널리 경사(經史)를 보는데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여러 가지 기예에 두루 능했는데, 더욱 바둑을 잘 두어서 12∼13세 때에 국수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과 1613년(광해군 5) 두 해에 걸쳐 두번이나 종시(宗試 : 종실에게 보이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봉래수(蓬萊守)를 제수받았고, 다시 승진하여 명선대부, 정의대부가 되어 군에 봉해졌다.
공의 나이 겨우 약관에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 1556∼1618)과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 1548∼1622)가 시관(試官)으로서 공에게 탄미하기를 “종실 중에 영재가 나왔다.”하였다. 이 때 일송이 공에게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라.”고 권하니, 이로부터 더욱 서적 속에 힘을 쏟아서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은 또한 산수를 즐겨 친분있는 선비들과 함께 동해바다 및 금강산을 두루 유람하고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지어, 공의 유고로 남겼다. 당시 시단의 상장(上將)인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 1597∼1673)이 평하기를 “극히 아름답다.”고 하였다.
조선 중기의 종실(宗室) 문인인 공의 금강산 기행문은 그의 문집인 <창주집(滄州集)>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가 1615년 7월 27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고 8월 26일에 돌아와 기록한 글이다. 그 내용은
“서울의 숭인문(崇仁門)을 떠나서 영평(永平)과 금화(金化)를 지나 배에 오른다. 우선 총석정(叢石亭)에서부터 유람을 시작하여 다음에 금란굴(金瀾窟)을 살펴보고 삼일포(三日浦)로 간다. 이어서 송도(松島) · 구암(龜巖) 등을 돌아보고 신계사(新戒寺)와 두솔암(兜率菴)을 거쳐 구정봉(九井峰)에 이르러 눈 내리는 광경을 바라본다. 작자는 발연(鉢淵)에 다가가서 돌빛의 희고 매끄러운 상태를 옥과 같다고 경탄한다. 다시 길을 나서 숙고(숙庫)를 지나 백천교(百川橋)에 올라보니, 아래에 있는 흰돌과 맑은 물이 거울과 같은데, 연어와 송어가 놀고 있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구점(狗岾)과 장항(獐項)을 지나 외원통(外圓通)에서 잠시 쉬고 박달곶(朴達串)으로 옮겨가니, 고개가 몹시 높고 가팔라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높아졌다. 여기에서 상운암(上雲菴)을 지나 유점사(楡岾寺)에서 1박하고, 하령대(下靈臺)에 오른다. 길을 반대로 하여 상령대를 거쳐 묘길상(妙吉祥)을 구경하고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간다. 보덕굴(普德窟)을 보고 만폭동(萬瀑洞)으로 가서 유명한 양사언(楊士彦)의 `봉래풍악지화동천(蓬萊楓嶽之化洞天)'이라는 큰 글씨를 감상한다. 표훈사(表訓寺)를 지나서 정양사(正陽寺)에 이르러 쉰 다음, 천일대(天逸臺)에 올라 중향성(衆香城) · 수미봉(須彌峰) · 반야봉(船若峰) · 비로봉(昆盧峰) 등 수많은 봉우리들을 전후좌우로 둘러본다. 유명한 십왕동(十王洞)을 보았는데, 금강산에는 이러한 곳이 세 곳이나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단발령(斷髮嶺)을 거쳐 춘천을 지나 귀로에 오른다.”
이 글은 시인의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도중에 풍류도 곁들이면서 여행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부친 귀천군이 순천에 귀양가 있을 때, 새벽과 저녁으로 모시고 받들어 편안히 해드려 그 뜻을 위로해 드렸다. 약과 음식으로 병환이 나기 전에 먼저 치료해 드려 무사히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게 했다. 또 인조반정으로 귀천군의 벼슬이 두 품계가 올라 영화가 여러 종실에 넘쳤으니, 이는 공의 효성이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임금을 따라 공산(公山 : 공주)에 이르렀다가, 임금이 환궁하자 벼슬을 올리고, 말을 하사하여 수고로움을 보답하였다. 1627년(인조 5) 호란(胡亂) 때에는 임금을 모시고 강화에 갔었고, 돌아와서는 임금을 모신 공로로 중의대부 봉래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올랐다.
1700년(숙종 26)에 3남 무(堥 : 莊靖公)의 추은으로 승헌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증직되었다.
문장과 행의(行誼)로 일세의 추앙을 받았다.
시단에 있어서도 <기아(箕雅)>와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올랐다.
유고가 국역판으로 간행되었다.
배위 현부인 전주최씨(1590∼1671)는 영월군수 행(行)의 딸이다.
묘갈명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시서(詩書)에 힘써 널리 경사(經史)를 보는데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여러 가지 기예에 두루 능했는데, 더욱 바둑을 잘 두어서 12∼13세 때에 국수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과 1613년(광해군 5) 두 해에 걸쳐 두번이나 종시(宗試 : 종실에게 보이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봉래수(蓬萊守)를 제수받았고, 다시 승진하여 명선대부, 정의대부가 되어 군에 봉해졌다.
공의 나이 겨우 약관에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 1556∼1618)과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 1548∼1622)가 시관(試官)으로서 공에게 탄미하기를 “종실 중에 영재가 나왔다.”하였다. 이 때 일송이 공에게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라.”고 권하니, 이로부터 더욱 서적 속에 힘을 쏟아서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은 또한 산수를 즐겨 친분있는 선비들과 함께 동해바다 및 금강산을 두루 유람하고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지어, 공의 유고로 남겼다. 당시 시단의 상장(上將)인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 1597∼1673)이 평하기를 “극히 아름답다.”고 하였다.
조선 중기의 종실(宗室) 문인인 공의 금강산 기행문은 그의 문집인 <창주집(滄州集)>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가 1615년 7월 27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고 8월 26일에 돌아와 기록한 글이다. 그 내용은
“서울의 숭인문(崇仁門)을 떠나서 영평(永平)과 금화(金化)를 지나 배에 오른다. 우선 총석정(叢石亭)에서부터 유람을 시작하여 다음에 금란굴(金瀾窟)을 살펴보고 삼일포(三日浦)로 간다. 이어서 송도(松島) · 구암(龜巖) 등을 돌아보고 신계사(新戒寺)와 두솔암(兜率菴)을 거쳐 구정봉(九井峰)에 이르러 눈 내리는 광경을 바라본다. 작자는 발연(鉢淵)에 다가가서 돌빛의 희고 매끄러운 상태를 옥과 같다고 경탄한다. 다시 길을 나서 숙고(숙庫)를 지나 백천교(百川橋)에 올라보니, 아래에 있는 흰돌과 맑은 물이 거울과 같은데, 연어와 송어가 놀고 있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구점(狗岾)과 장항(獐項)을 지나 외원통(外圓通)에서 잠시 쉬고 박달곶(朴達串)으로 옮겨가니, 고개가 몹시 높고 가팔라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높아졌다. 여기에서 상운암(上雲菴)을 지나 유점사(楡岾寺)에서 1박하고, 하령대(下靈臺)에 오른다. 길을 반대로 하여 상령대를 거쳐 묘길상(妙吉祥)을 구경하고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간다. 보덕굴(普德窟)을 보고 만폭동(萬瀑洞)으로 가서 유명한 양사언(楊士彦)의 `봉래풍악지화동천(蓬萊楓嶽之化洞天)'이라는 큰 글씨를 감상한다. 표훈사(表訓寺)를 지나서 정양사(正陽寺)에 이르러 쉰 다음, 천일대(天逸臺)에 올라 중향성(衆香城) · 수미봉(須彌峰) · 반야봉(船若峰) · 비로봉(昆盧峰) 등 수많은 봉우리들을 전후좌우로 둘러본다. 유명한 십왕동(十王洞)을 보았는데, 금강산에는 이러한 곳이 세 곳이나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단발령(斷髮嶺)을 거쳐 춘천을 지나 귀로에 오른다.”
이 글은 시인의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도중에 풍류도 곁들이면서 여행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부친 귀천군이 순천에 귀양가 있을 때, 새벽과 저녁으로 모시고 받들어 편안히 해드려 그 뜻을 위로해 드렸다. 약과 음식으로 병환이 나기 전에 먼저 치료해 드려 무사히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게 했다. 또 인조반정으로 귀천군의 벼슬이 두 품계가 올라 영화가 여러 종실에 넘쳤으니, 이는 공의 효성이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임금을 따라 공산(公山 : 공주)에 이르렀다가, 임금이 환궁하자 벼슬을 올리고, 말을 하사하여 수고로움을 보답하였다. 1627년(인조 5) 호란(胡亂) 때에는 임금을 모시고 강화에 갔었고, 돌아와서는 임금을 모신 공로로 중의대부 봉래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올랐다.
1700년(숙종 26)에 3남 무(堥 : 莊靖公)의 추은으로 승헌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증직되었다.
문장과 행의(行誼)로 일세의 추앙을 받았다.
시단에 있어서도 <기아(箕雅)>와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올랐다.
유고가 국역판으로 간행되었다.
배위 현부인 전주최씨(1590∼1671)는 영월군수 행(行)의 딸이다.
묘갈명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봉산군(蓬山君) 1603∼1682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신(烱信), 자는 여우(汝友).
귀천군의 3남이다. 귀천군이 광해군 때에 목숨을 걸고 오직 구국일념으로 금산군(錦山君) 성윤(誠胤) 등 참소(參疏) 종친 19인의 소두(疏頭)로서 극언을 다하여 상소를 올리다가, 멀리 남쪽 변방 순천으로 귀양갔는데, 그 해 공의 나이 15∼16세였다. 공은 항상 두려워하며 조심하여 무릇 화를 입을 만한 일은 늦추기를 지극히 하였고, 그 해(1617년) 봉산수(蓬山守)로 초수(初授)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부친이 귀양에서 풀려나 공의 형제 5인이 정성껏 봉양하여 이름있는 날과 명절마다 채색옷을 입고 잔을 드리니 세상 사람이 모두 부러워하고 칭찬하였다.
1649년(인조 27) 인조대왕의 대상 때 혼전의 제관이 되었고 1651년(효종 2) 영은전(永恩殿)의 제관 공로로 봉산도정(蓬山都正)에 올랐다.
1659년(효종 10) 효종대왕의 혼전 제관에 선임되었는데 공경하고 삼가하여 예의를 잃는 일이 없었다.
1661년(현종 2) 경모전(敬慕殿) 제관의 공로로 정의대부에 올라 봉산군에 봉군되었다.
1662년(현종 3) 현종대왕의 온천 행차가 있을 때마다 도총부 부총관 주원(廚院) 제조로 한결같이 수행하였다.
1673년(현종 14)에 임금이 이미 “계급을 올리라.”고 명령하였는데, 이 때에 대신 이상진(李尙眞)이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봉산군은 고(故) 귀천군의 아들인데 그의 아들 돈(墪)이 바야흐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다.”고 하였다.
1681년(숙종 7) 공의 3남 돈이 대과에 급제하여 지평이 되었는데 이 때의 공의 연세 79세였다.
공의 처음 수(守)는 관례에 따른 것이고, 차례로 평탄하게 품계가 올랐으며, 혹은 공로로써 상을 받기도 하였다. 70세에 중의대부에, 또 9년 후에 승헌대부에 오르고, 또 1년 지나서 1682년(숙종 8) 80세로 가덕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오르니 은혜스러운 영광이 이에 이르렀다.
배위는 두분인데 증 군부인 청주한씨는 가선(嘉善) 군수 형의 딸이고, 증 군부인 청주한씨는 판관 득일(得一)의 딸이다.
묘갈명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귀천군의 3남이다. 귀천군이 광해군 때에 목숨을 걸고 오직 구국일념으로 금산군(錦山君) 성윤(誠胤) 등 참소(參疏) 종친 19인의 소두(疏頭)로서 극언을 다하여 상소를 올리다가, 멀리 남쪽 변방 순천으로 귀양갔는데, 그 해 공의 나이 15∼16세였다. 공은 항상 두려워하며 조심하여 무릇 화를 입을 만한 일은 늦추기를 지극히 하였고, 그 해(1617년) 봉산수(蓬山守)로 초수(初授)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부친이 귀양에서 풀려나 공의 형제 5인이 정성껏 봉양하여 이름있는 날과 명절마다 채색옷을 입고 잔을 드리니 세상 사람이 모두 부러워하고 칭찬하였다.
1649년(인조 27) 인조대왕의 대상 때 혼전의 제관이 되었고 1651년(효종 2) 영은전(永恩殿)의 제관 공로로 봉산도정(蓬山都正)에 올랐다.
1659년(효종 10) 효종대왕의 혼전 제관에 선임되었는데 공경하고 삼가하여 예의를 잃는 일이 없었다.
1661년(현종 2) 경모전(敬慕殿) 제관의 공로로 정의대부에 올라 봉산군에 봉군되었다.
1662년(현종 3) 현종대왕의 온천 행차가 있을 때마다 도총부 부총관 주원(廚院) 제조로 한결같이 수행하였다.
1673년(현종 14)에 임금이 이미 “계급을 올리라.”고 명령하였는데, 이 때에 대신 이상진(李尙眞)이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봉산군은 고(故) 귀천군의 아들인데 그의 아들 돈(墪)이 바야흐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다.”고 하였다.
1681년(숙종 7) 공의 3남 돈이 대과에 급제하여 지평이 되었는데 이 때의 공의 연세 79세였다.
공의 처음 수(守)는 관례에 따른 것이고, 차례로 평탄하게 품계가 올랐으며, 혹은 공로로써 상을 받기도 하였다. 70세에 중의대부에, 또 9년 후에 승헌대부에 오르고, 또 1년 지나서 1682년(숙종 8) 80세로 가덕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오르니 은혜스러운 영광이 이에 이르렀다.
배위는 두분인데 증 군부인 청주한씨는 가선(嘉善) 군수 형의 딸이고, 증 군부인 청주한씨는 판관 득일(得一)의 딸이다.
묘갈명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봉양정(鳳陽正) 1619∼1682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인(烱仁), 풍천도정의 손자이며 처음에 봉양감(鳳陽監)으로 제수되었고, 창선대부 봉양정에 이르렀다.
배위 신인 풍산심씨는 대진(大振)의 딸이다.
배위 신인 풍산심씨는 대진(大振)의 딸이다.
봉주정(蓬洲正) 1608∼1663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길(烱佶), 자는 여경(汝慶).
귀천군의 4남으로 처음에 봉주수(蓬洲守)로 제수되었고, 창선대부 봉주정에 이르렀다.
배위 신인 청해이씨(1605∼1630)는 증 승지 명로(明老)의 딸이다.
묘지(墓誌)가 있다.
귀천군의 4남으로 처음에 봉주수(蓬洲守)로 제수되었고, 창선대부 봉주정에 이르렀다.
배위 신인 청해이씨(1605∼1630)는 증 승지 명로(明老)의 딸이다.
묘지(墓誌)가 있다.
봉창수(蓬昌守) 1610∼1637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엄(烱儼).
귀천군의 5남으로 처음에 봉창수로 제수받았고, 품계가 창선대부에 이르렀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부친이 1617년(광해군 9)에 적신 이이첨을 논척하는 소를 올린 끝에, 남쪽 해변 순천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 당년 8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모시고 가서, 귀양에서 풀려 돌아올 때까지 5년간 맛있는 음식으로 몸소 받들어 모시었다.
그 동안 몸에 스며든 장기(瘴氣)의 독으로 2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배위 신인 안동권씨(1610∼1635)는 통사랑 전의 딸이다.
묘지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귀천군의 5남으로 처음에 봉창수로 제수받았고, 품계가 창선대부에 이르렀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부친이 1617년(광해군 9)에 적신 이이첨을 논척하는 소를 올린 끝에, 남쪽 해변 순천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 당년 8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모시고 가서, 귀양에서 풀려 돌아올 때까지 5년간 맛있는 음식으로 몸소 받들어 모시었다.
그 동안 몸에 스며든 장기(瘴氣)의 독으로 2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배위 신인 안동권씨(1610∼1635)는 통사랑 전의 딸이다.
묘지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봉흥도정(蓬興都正) 1625∼ ?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좌(烱佐), 귀천군의 9남으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소생이다.
처음에 봉흥령(蓬興令)으로 제수되고, 손자 기상(箕商)의 추은으로 명선대부 봉흥도정에 증직되었다.
배위 증 신부인 함양여씨는 지길(祉吉)의 딸이다.
처음에 봉흥령(蓬興令)으로 제수되고, 손자 기상(箕商)의 추은으로 명선대부 봉흥도정에 증직되었다.
배위 증 신부인 함양여씨는 지길(祉吉)의 딸이다.
서계령(西溪令) 1614∼1672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숙(烱淑).
귀원군의 차남으로 처음에 서계령(西溪令)으로 제수되었고, 명선대부 서계령에 올랐다.
배위 신부인 여흥민씨(1615∼1663)는 수사 헌(巘)의 딸이다.
귀원군의 차남으로 처음에 서계령(西溪令)으로 제수되었고, 명선대부 서계령에 올랐다.
배위 신부인 여흥민씨(1615∼1663)는 수사 헌(巘)의 딸이다.
서양도정(西陽都正) 1601∼1684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의(烱義).
풍산군의 3남 귀원군의 장남으로 처음에 서양령(西陽令)으로 제수되었고, 명선대부 서양도정에 올랐다.
배위 신부인 광산김씨(1600∼1662)는 여룡(汝龍)의 딸이다.
풍산군의 3남 귀원군의 장남으로 처음에 서양령(西陽令)으로 제수되었고, 명선대부 서양도정에 올랐다.
배위 신부인 광산김씨(1600∼1662)는 여룡(汝龍)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