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군파 4세 약사에는 총 2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영릉부령(靈陵副令) 1603∼ ? 파명:양원군(楊原君)
  영릉부령(靈陵副令) [1603(선조 36)∼ ? ]
휘는 질(車+至), 양원군의 증손으로 익창부수의 차남이다. 별세한 년월일은 부전되고 있다. 모친은 신부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洛)의 딸이다. 명선대부와 부령을 제수받았다. 배위는 죽산박씨로 지빈(之斌)의 딸과 신인 단양우씨 경중(敬中)의 딸이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영방(榮芳) · 차남 기방(起芳) · 3남 최방(最芳) · 4남 신방(新芳)이며 장녀는 박세필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남정창(南廷昌)에게 3녀는 군수인 김정상(金鼎祥)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휘는 질(車+至), 양원군의 증손으로 익창부수의 차남이다. 별세한 년월일은 부전되고 있다. 모친은 신부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洛)의 딸이다. 명선대부와 부령을 제수받았다. 배위는 죽산박씨로 지빈(之斌)의 딸과 신인 단양우씨 경중(敬中)의 딸이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영방(榮芳) · 차남 기방(起芳) · 3남 최방(最芳) · 4남 신방(新芳)이며 장녀는 박세필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남정창(南廷昌)에게 3녀는 군수인 김정상(金鼎祥)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영산부령(靈山副令) 1626∼ ? 파명:양원군(楊原君)
  영산부령(靈山副令) [1626(인조 4)∼ ? ]
휘는 소(昭), 양원군의 증손으로 익창부수의 넷째 아들이다. 1626년(인조 4) 11월 20일 태어나 정월 14일에 별세하였다. 부령을 제수받았으며 모친은 신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의 딸이다. 배위는 순인 안동권씨로 판서 숙의 딸이며 4남을 두었으니 장남 익방(益芳) · 차남 두방(斗芳) · 3남 명방(命芳) · 4남 일방(日芳) 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산 358번지에 예장하였다.
휘는 소(昭), 양원군의 증손으로 익창부수의 넷째 아들이다. 1626년(인조 4) 11월 20일 태어나 정월 14일에 별세하였다. 부령을 제수받았으며 모친은 신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의 딸이다. 배위는 순인 안동권씨로 판서 숙의 딸이며 4남을 두었으니 장남 익방(益芳) · 차남 두방(斗芳) · 3남 명방(命芳) · 4남 일방(日芳) 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산 358번지에 예장하였다.
영원부령(靈原副令) 1611∼ ? 파명:양원군(楊原君)
  영원부령(靈原副令) [1611(광해군 3)∼ ? ]
휘는 탁(晫), 양원군의 증손으로 익창부수의 장남이다. 별세한 년월일은 부전되고 있으며 모친은 신부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洛)의 딸이다. 배위는 경주이씨로 6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석방(碩芳) · 차남 명방(明芳) · 3남 취방(就芳) · 4남 준방(俊芳) · 5남 필방(必芳) · 6남 유방(惟芳)이며 장녀는 박건(朴健)에게 출가, 차녀는 최숙(崔塾)에게, 3녀는 현감 백여규(白如圭)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휘는 탁(晫), 양원군의 증손으로 익창부수의 장남이다. 별세한 년월일은 부전되고 있으며 모친은 신부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洛)의 딸이다. 배위는 경주이씨로 6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석방(碩芳) · 차남 명방(明芳) · 3남 취방(就芳) · 4남 준방(俊芳) · 5남 필방(必芳) · 6남 유방(惟芳)이며 장녀는 박건(朴健)에게 출가, 차녀는 최숙(崔塾)에게, 3녀는 현감 백여규(白如圭)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영천군(靈川君) 1550∼1608 파명:양원군(楊原君)
  영천군(靈川君) [1550(명종 5)∼1608(선조 41)]
함녕군의 계자(繼子)로 휘는 정(?), 자는 언직(彦直). 1550년 6월 28일에 태어나 1608년 5월 5일에 별세하였다. 모친은 현부인 안동김씨로 병사 석(奭)의 딸이다.
배위 현부인 임단김씨는 호조정랑 사근(思謹)의 딸로 2월 9일에 태어나 7월 22일에 별세하였고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경명군묘 뒤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그 후 1995년 이장하여 부군 묘에 부우하였다.
배위 현부인 여량송씨는 영의정 질(칋)의 증손 풍저창수(豊儲倉守) 빈(賓) 의 딸로 10월 15일에 태어나 1590년(선조 23) 5월 8일에 별세하였고 부군 묘에 부좌 예장하였다.
배위 현부인 상주김씨는 좌의정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 귀영(貴榮)의 딸로 7월 13일에 태어나 병자호란으로 1637년(인조 15) 정월 22일에 순절하였으며 진원군(珍原君)이 상을 받들어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영천군 묘하에 의관(衣冠) 장례지냈다. 난이 평정된 후 인조대왕이 정려(旌閭)를 내리도록 명하여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야당리 상원군 사우에 정표 의 사판이 보관되어 있고 열녀 충신의 정려문(충열의 집)이 있다. 영천군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여원도정(礪原都正) · 차남 상원군(祥原君) · 3남 낙원부수(洛原副守) · 4남 진원군(珍原君)이며 장녀는 청송심씨 정화(廷和)에게, 차녀는 수원최씨 태노(泰魯)에게 출가했다. 영천군의 묘소는 선영(先塋) 숙의 남양홍씨 묘하 축좌에 예장하였다.
함녕군의 계자(繼子)로 휘는 정(?), 자는 언직(彦直). 1550년 6월 28일에 태어나 1608년 5월 5일에 별세하였다. 모친은 현부인 안동김씨로 병사 석(奭)의 딸이다.
배위 현부인 임단김씨는 호조정랑 사근(思謹)의 딸로 2월 9일에 태어나 7월 22일에 별세하였고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경명군묘 뒤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그 후 1995년 이장하여 부군 묘에 부우하였다.
배위 현부인 여량송씨는 영의정 질(칋)의 증손 풍저창수(豊儲倉守) 빈(賓) 의 딸로 10월 15일에 태어나 1590년(선조 23) 5월 8일에 별세하였고 부군 묘에 부좌 예장하였다.
배위 현부인 상주김씨는 좌의정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 귀영(貴榮)의 딸로 7월 13일에 태어나 병자호란으로 1637년(인조 15) 정월 22일에 순절하였으며 진원군(珍原君)이 상을 받들어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영천군 묘하에 의관(衣冠) 장례지냈다. 난이 평정된 후 인조대왕이 정려(旌閭)를 내리도록 명하여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야당리 상원군 사우에 정표 의 사판이 보관되어 있고 열녀 충신의 정려문(충열의 집)이 있다. 영천군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여원도정(礪原都正) · 차남 상원군(祥原君) · 3남 낙원부수(洛原副守) · 4남 진원군(珍原君)이며 장녀는 청송심씨 정화(廷和)에게, 차녀는 수원최씨 태노(泰魯)에게 출가했다. 영천군의 묘소는 선영(先塋) 숙의 남양홍씨 묘하 축좌에 예장하였다.
영해부령(靈海副令) 1629∼1689 파명:양원군(楊原君)
  영해부령(靈海副令) [1629(인조 7)∼1689(숙종 15)]
휘는 방(昉), 자는 원명(遠明). 양원군의 3남 화령군의 손자이다. 1629년(인조 7) 11월 12일 충청도 괴산 아미동에서 태어나, 1689년(숙종 15) 7월 12일에 별세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창선대부를 제수받고 1684년(숙종 10)에 명선대부로 승계되었다. 재기가 있었으나 그 당시 왕실의 자손은 4대까지 벼슬자리에 나아갈 수 없다고 하여 문학의 업은 일삼지 않았다.
모친은 신부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의 딸이다. 배위는 신부인 배천조씨로 선(詵)의 딸이다. 1637년(인조 15) 4월 4일 태어났으며 기일은 11월 10일이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문광광덕후록 선영하 손좌에 예장하였다. 8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익화(益華) · 차남 태화(泰華) · 3남 진화(震華) · 4남 덕화(德華) · 5남 필화(必華) · 6남 옥석(玉石) · 7남 천석(千石) · 8남 만석(萬石)이다.
장녀는 안동김씨 숙(潚)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파평윤씨 윤(倫)에게 3녀는 순흥안씨 재원(載遠)에게 4녀는 서창석(徐昌碩)에게 출가하였다.
휘는 방(昉), 자는 원명(遠明). 양원군의 3남 화령군의 손자이다. 1629년(인조 7) 11월 12일 충청도 괴산 아미동에서 태어나, 1689년(숙종 15) 7월 12일에 별세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창선대부를 제수받고 1684년(숙종 10)에 명선대부로 승계되었다. 재기가 있었으나 그 당시 왕실의 자손은 4대까지 벼슬자리에 나아갈 수 없다고 하여 문학의 업은 일삼지 않았다.
모친은 신부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의 딸이다. 배위는 신부인 배천조씨로 선(詵)의 딸이다. 1637년(인조 15) 4월 4일 태어났으며 기일은 11월 10일이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문광광덕후록 선영하 손좌에 예장하였다. 8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익화(益華) · 차남 태화(泰華) · 3남 진화(震華) · 4남 덕화(德華) · 5남 필화(必華) · 6남 옥석(玉石) · 7남 천석(千石) · 8남 만석(萬石)이다.
장녀는 안동김씨 숙(潚)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파평윤씨 윤(倫)에게 3녀는 순흥안씨 재원(載遠)에게 4녀는 서창석(徐昌碩)에게 출가하였다.
영흥부령(靈興副令) 1615∼1696 파명:양원군(楊原君)
  영흥부령(靈興副令) [1615(광해군 7)∼1696(숙종 22)]
휘는 경(暻), 양원군의 증손으로 익창부수의 셋째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 7) 11월 14일 태어나 1696년(숙종 22) 9월 15일에 별세하였으며 창선대부와 부령을 제수받았다.
모친은 신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의 딸이다. 배위는 신인 순천박씨로 창선대부 시영(時榮)의 딸이다. 5남을 두었으니 장남 세방(世芳) · 차남 지방(枝芳) · 3남 선방(善芳) · 4남 정방(廷芳) · 5남 춘방(春芳)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산358번지 기좌에 합폄으로 예장하였다.
휘는 경(暻), 양원군의 증손으로 익창부수의 셋째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 7) 11월 14일 태어나 1696년(숙종 22) 9월 15일에 별세하였으며 창선대부와 부령을 제수받았다.
모친은 신인 고령신씨로 주부 낙의 딸이다. 배위는 신인 순천박씨로 창선대부 시영(時榮)의 딸이다. 5남을 두었으니 장남 세방(世芳) · 차남 지방(枝芳) · 3남 선방(善芳) · 4남 정방(廷芳) · 5남 춘방(春芳)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산358번지 기좌에 합폄으로 예장하였다.
익창부수(益昌副守) 1588∼1661 파명:양원군(楊原君)
  익창부수(益昌副守) [1588(선조 21)∼1661(현종 2)]
휘는 충생(忠生), 양원군의 손자이며 화령군의 차남이다. 1588년(선조 21) 8월 18일에 태어나 1661년(현종 2)에 별세하였다. 명선대부를 제수받았고, 모친은 봉화금씨이며 배위는 신부인 고령신씨 주부 낙(洛)의 딸이다. 5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영원부령(靈原副令), 차남 영릉부령(靈陵副令), 3남 영흥부령(靈興副令), 4남 영산부령(靈山副令), 5남 영해부령(靈海副令)이며, 장녀는 이기백(李起白)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이명필(李明弼)에게, 3녀는 충주박씨 유중(維重)에게, 4녀는 김이장(金以章)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후록산 중봉 손좌에 예장하였다.
휘는 충생(忠生), 양원군의 손자이며 화령군의 차남이다. 1588년(선조 21) 8월 18일에 태어나 1661년(현종 2)에 별세하였다. 명선대부를 제수받았고, 모친은 봉화금씨이며 배위는 신부인 고령신씨 주부 낙(洛)의 딸이다. 5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영원부령(靈原副令), 차남 영릉부령(靈陵副令), 3남 영흥부령(靈興副令), 4남 영산부령(靈山副令), 5남 영해부령(靈海副令)이며, 장녀는 이기백(李起白)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이명필(李明弼)에게, 3녀는 충주박씨 유중(維重)에게, 4녀는 김이장(金以章)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후록산 중봉 손좌에 예장하였다.
진원군(珍原君) 1603∼1655 파명:양원군(楊原君)
  진원군(珍原君) [1603(선조 36)∼1655(효종 6)]
휘는 세완(世完), 자는 자고(子固). 양원군의 증손으로 상원군의 아우이다.
1603년(선조 36) 8월 19일 태어나 1655년(효종 6) 7월 1일 향년 53세에 병환으로 명례동 집에서 별세하였다. 모친은 상주김씨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인품이 월등하게 뛰어나고 강개하였으며 고인의 풍모가 있었다. 배위는 우의정 준(晙)의 딸로 현부인 함양박씨와 배위 우의정 준겸(浚謙)의 딸로 현부인 청주한씨, 배위 창손(昌孫)의 딸인 현부인 안동권씨이다. 모친인 상주김씨와 형의 내외분도 강화도 남문루에서 자분 절명하였다. 인열왕후와 자매간인 진원군 부인 청주한씨도 자결하였다. 부음을 듣고 강화도로 돌아가 상을 받들어 선산에 예장하였다. 복이 끝나니 을해년에 수직한 노고로 정의대부로 품계가 올랐으며 효종대왕은 심양에서 돌아와 진원군 일가의 죽음에 대하여 아뢰었다.
인조대왕은 즉시 예관에게 명하여 정려를 모두 세우게 하였다. 격난 후 세상에 뜻을 두지않고 항상 거친 베옷을 입고 유유자적하게 세월을 보내는 중 1649년(인조 27) 인조대왕이 승하하니 다시 향관으로 수직하였다. 그 공로로 중의대부에 올랐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 해좌에 예장하였으나 전란으로 실전되었다. 1남 3녀를 두었고 아들은 운(雲)이고 장녀는 통덕랑 원주원씨 태하(泰夏)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정흥주(鄭興周)에게, 3녀는 남세정(南世貞)에게 출가했다.
휘는 세완(世完), 자는 자고(子固). 양원군의 증손으로 상원군의 아우이다.
1603년(선조 36) 8월 19일 태어나 1655년(효종 6) 7월 1일 향년 53세에 병환으로 명례동 집에서 별세하였다. 모친은 상주김씨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인품이 월등하게 뛰어나고 강개하였으며 고인의 풍모가 있었다. 배위는 우의정 준(晙)의 딸로 현부인 함양박씨와 배위 우의정 준겸(浚謙)의 딸로 현부인 청주한씨, 배위 창손(昌孫)의 딸인 현부인 안동권씨이다. 모친인 상주김씨와 형의 내외분도 강화도 남문루에서 자분 절명하였다. 인열왕후와 자매간인 진원군 부인 청주한씨도 자결하였다. 부음을 듣고 강화도로 돌아가 상을 받들어 선산에 예장하였다. 복이 끝나니 을해년에 수직한 노고로 정의대부로 품계가 올랐으며 효종대왕은 심양에서 돌아와 진원군 일가의 죽음에 대하여 아뢰었다.
인조대왕은 즉시 예관에게 명하여 정려를 모두 세우게 하였다. 격난 후 세상에 뜻을 두지않고 항상 거친 베옷을 입고 유유자적하게 세월을 보내는 중 1649년(인조 27) 인조대왕이 승하하니 다시 향관으로 수직하였다. 그 공로로 중의대부에 올랐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 해좌에 예장하였으나 전란으로 실전되었다. 1남 3녀를 두었고 아들은 운(雲)이고 장녀는 통덕랑 원주원씨 태하(泰夏)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정흥주(鄭興周)에게, 3녀는 남세정(南世貞)에게 출가했다.
평창군(平昌君) 1574∼1644 파명:양원군(楊原君)
 평창군(平昌君) [1574(선조 7)∼1644(인조 22)]
휘는 만수(萬壽), 자는 헌지(獻之). 양원군의 손자이며 화령군의 셋째 아들이다.
1574년(선조 7) 2월 22일에 태어나 1644년 (인조 22) 정월 20일 별세하였다. 처음에 창선대부와 평창수를 제수 받았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평창군으로 추증되었다.
모친은 현부인 상주박씨이며 배위는 현부인 해남윤씨로 감사 유기(唯幾)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1남은 해천군이며 1녀는 김중영(金重英)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온수곡 국내 묘좌에 예장하였다.
휘는 만수(萬壽), 자는 헌지(獻之). 양원군의 손자이며 화령군의 셋째 아들이다.
1574년(선조 7) 2월 22일에 태어나 1644년 (인조 22) 정월 20일 별세하였다. 처음에 창선대부와 평창수를 제수 받았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평창군으로 추증되었다.
모친은 현부인 상주박씨이며 배위는 현부인 해남윤씨로 감사 유기(唯幾)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1남은 해천군이며 1녀는 김중영(金重英)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온수곡 국내 묘좌에 예장하였다.
함녕군(咸寧君) 1524∼1579 파명:양원군(楊原君)
  함녕군(咸寧君) [1524(중종 19)∼1579(선조 12)]
휘는 수선(壽璿), 자는 정중(正仲). 양원군의 장남으로 1524년(중종 19) 3월 24일에 태어나 1579년(선조 12) 정월 12일 향년 56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숙의 남양홍씨 묘로부터 약 100미터 떨어진 계좌에 예장하였다. 배위 현부인 파평윤씨는 인산첨사(麟山僉使) 현(俔)의 딸로 후사 없이 일찍 별세하였고 묘소는 복정동 양원군 묘에서 서쪽으로 약 100미터 떨어진 곳에 예장하였다. 배위 안동권씨는 병조참의(兵曹參議) 덕여(德與)의 딸로 역시 후사가 없었다. 권부인은 5월 22일에 태어나 4월 18일에 별세하여 함녕군 묘 좌측에 봉분을 달리하여 예장하였고 함녕군에게 후사가 없어 경명군(景明君)의 손 영천군(靈川君)을 후사로 맞이하였다. 슬하에 1녀를 두었고 여흥민씨 설(說)에게 출가했다.
휘는 수선(壽璿), 자는 정중(正仲). 양원군의 장남으로 1524년(중종 19) 3월 24일에 태어나 1579년(선조 12) 정월 12일 향년 56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숙의 남양홍씨 묘로부터 약 100미터 떨어진 계좌에 예장하였다. 배위 현부인 파평윤씨는 인산첨사(麟山僉使) 현(俔)의 딸로 후사 없이 일찍 별세하였고 묘소는 복정동 양원군 묘에서 서쪽으로 약 100미터 떨어진 곳에 예장하였다. 배위 안동권씨는 병조참의(兵曹參議) 덕여(德與)의 딸로 역시 후사가 없었다. 권부인은 5월 22일에 태어나 4월 18일에 별세하여 함녕군 묘 좌측에 봉분을 달리하여 예장하였고 함녕군에게 후사가 없어 경명군(景明君)의 손 영천군(靈川君)을 후사로 맞이하였다. 슬하에 1녀를 두었고 여흥민씨 설(說)에게 출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