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양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파원도정(坡原都正) 1560∼1610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응복(應福), 자는 성생(聖生). 익양군의 증손이다. 1590년(선조 23)에 처음으로 군수가 되었다. 1600년(선조 33) 선조대왕 정비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을 돕는데 뽑혔다. 1603년(선조 36)에 이 공으로 명선대부를 제수받았고 품계가 도정에 올랐다.
파흥군(坡興君) 1570∼1653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응순(應順), 자는 자화(子和). 익양군의 증손이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임금의 행차를 모신 공훈이 있어 비의(緋衣)를 하사받았다. 병자호란에 임금을 호종하여 도정에 승계되었고 1649년(인조 27)에 군에 봉해졌다.
학림정(鶴林正) 1545∼1612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경윤(慶胤), 자는 가길(嘉吉), 호는 낙파(駱坡) · 학록(鶴鹿) · 낙촌(駱村). 익양군의 증손이다. 서화에 능하였고 동생 죽림수 영윤(英胤)과 두 아들 그리고 4남인 징(澄) 모두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다. 학림수(鶴林守)를 제수받았고 뒤에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졌다. 중국에 사절로 2회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왕의 서행(西幸)을 보좌하지 않고 산속으로 피신하였다고 하여 사헌부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30년 연상인 절파풍(浙派風)의 대가 김시(金?)와 친밀하게 교유하면서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 (聽竹턛史)>에서 그의 그림이 고담(枯淡)한 가운데 정취가 있고 거칠고 성근 맛이 하나도 없어 “김시와 비교해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평하였었다. 그리고 윤두서(尹斗緖)는 그의 그림에 대하여 강하고 굳고 우아하고 깨끗하나 협소함이 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들은 대체로 소경(小景) 산수인물화와 동물화들인데 모두 조선중기 절파화풍의 특징을 보여준다. 소경산수인물화는 최립(崔쬬)의 발문과 찬시(贊詩)가 있는 <인물화첩>(호림미술관 소장)이 그의 진작으로 가장 신빙도가 높다. 특히 인물 · 산수 · 우마 · 영모(翎毛)에 능하여 송단보월도(松壇步月圖) · 고사관월도(高士觀月圖) · 수하탁족도(樹下濯足圖) 등을 남겼으며 원나라 화풍을 받아 고일소산(高逸蕭散)한 풍취를 보이고 있다.
학성군(鶴城君) 1563∼?]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주(?), 자는 자한(子罕). 익양군의 손자이다. 병자호란 때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까지 호종한 공으로 진무훈(振武勳)에 기록되고 늙어서 기사(耆社)에 들어갔는데 궤장(?杖)을 내린 그림이 내각에 간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