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학성군(鶴城君) 1470∼1543 파명:덕천군(德泉君)
  신종군의 4남이며 배위는 현부인 광주안씨이다. 처음 학성(鶴城 : 함경북도의 울산)군수에 임명되었고 1499년(연산군 5)에 승진하여 정(正)이 되었다. 중종 때 원종 1등공신에 녹훈되어 위계가 명선대부에 이르렀으며 1530년(중종 25)에는 선릉(宣陵)에 번(番)드는 반열에 뽑혔다. 이듬해 봄에 정의대부로 가자(加資)되어 군(君)으로 봉해졌고 1543년(중종 38)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4세였다. 임금은 나라의 법도대로 부의를 내렸으며 1544년(중종 39) 2월 17일에 양주 읍의 남쪽 고양주 마사평 자좌 오향 언덕에 예장하였는데, 이곳은 공의 광나루(廣津) 별장 옆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지혜롭고 소탈하였으며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또한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며 공부하는 동문들이 모두 공경하였고 선비들이 모두 사랑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여 부모님이 생존하였을 때는 조석으로 문안드리는 예법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정성을 다하여 추모하였다. 급난(急難)이 있어 형제들이 재산을 나누게 되었을 때에는 터럭만큼도 다투는 일이 없었고, 부친의 기일이 되면 아무리 추운 날일지라도 반드시 목욕을 하였다. 강가에 별장을 지어 깨끗하고 꼿꼿하게 살면서 안개와 구름, 바람과 달을 보고 시를 지었고 술잔을 대할 때마다 시를 지었다.
공은 자신이 죽고난 뒤의 일을 미리 조치해 두었으니, 초상에서부터 탈상할 때까지의 일을 다 자세하게 준비해 놓았다.
묘소는 서울 성동구 광장동 아차산에 있었으나 1977년 8월 1일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 산30번지 현달산(顯達山)으로 이장하였으며, 신도비가 있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여 부모님이 생존하였을 때는 조석으로 문안드리는 예법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정성을 다하여 추모하였다. 급난(急難)이 있어 형제들이 재산을 나누게 되었을 때에는 터럭만큼도 다투는 일이 없었고, 부친의 기일이 되면 아무리 추운 날일지라도 반드시 목욕을 하였다. 강가에 별장을 지어 깨끗하고 꼿꼿하게 살면서 안개와 구름, 바람과 달을 보고 시를 지었고 술잔을 대할 때마다 시를 지었다.
공은 자신이 죽고난 뒤의 일을 미리 조치해 두었으니, 초상에서부터 탈상할 때까지의 일을 다 자세하게 준비해 놓았다.
묘소는 서울 성동구 광장동 아차산에 있었으나 1977년 8월 1일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 산30번지 현달산(顯達山)으로 이장하였으며, 신도비가 있다.
함풍군(咸豊君) 1477∼1558 파명:덕천군(德泉君)
  휘는 계수(繼壽), 자는 사신(思愼). 정의대부 함풍도정(咸豊都正)이었으며 증손 경석(景奭)의 귀현(貴顯)으로 인해 군(君)으로 추증되었다. `한성 서문 밖에 공의 옛 집터가 있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성 서문(지금의 서대문) 밖에 공의 옛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함풍군 집 뜰에 좋은 목단꽃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인 진복창(陳復昌)이 와서 구경하고 싶어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은 즉시 그 꽃을 쳐서 없애버렸다. 당시 진복창은 임금의 신임을 받아 위세가 당당하던 참이라 자기 마음대로 복종시키거나 혹은 은혜를 베풀어 심복으로 만들 수도 있는 판이어서, 사람들이 다 공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에게 해를 입히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후로 공의 집안 자손은 더욱 유명해졌고 충효와 청백으로 대를 이어 조상의 유업을 성취하였다.
배위는 현부인 파평윤씨로 군수 방(滂)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 동작구 사당동 산44번지 23호 신좌이고 표석과 지문은 7대손 광려가 지었다.
배위는 현부인 파평윤씨로 군수 방(滂)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 동작구 사당동 산44번지 23호 신좌이고 표석과 지문은 7대손 광려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