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희년(希年) ? ∼ ?    파명:경녕군(敬寧君)
  평양부령의 아들이다. 무과에 등제하여 판관벼슬에 이르렀다. 배위는 북청이씨 창수(昌壽)의 딸과 안동권씨 순경(舜卿)의 딸이다. 슬하에 사회(師回) · 사점(師點) · 사건(師騫) 3남을 두었다.

희두(喜斗) ?∼?    파명:경녕군(敬寧君)
  복성군의 14대손이다. 경인년 7월 26일에 태어나 판중추부사 겸 호조참판을 지내고 증 호조판서가 되었다. 배위는 정부인 김해김씨와 정부인 전주최씨가 있다. 슬하에 종순(鍾淳) 1남을 두었다.

희득(希得) 1525∼160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덕보(德甫), 호는 청담(淸潭). 하동군의 6남으로, 희온 · 희량 · 희검의 아우이다. 1572년(선조 5) 친시(親試) 병과에 급제했다. 1583년(선조 16) 사간이 되어, `김우옹의 소장은 그 내용이 편벽된 사설(私說)에 지나지 않으므로, 양사(兩司)를 벼슬에 나오게 할 것\'을 청하여 그대로 실시하게 하였다. 1592년(선조 25) 북도(北道) 순검사가 되어 도로의 형편을 시찰하였으며,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03년(선조 36) 공신록에 책록되었다. 1604년(선조 37) 춘추 80의 고령으로, 자헌대부의 가자를 받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공이 별세하자 조정은 하루 동안 철조하고, 부의를 후하게 보내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아부하지 않으며, 박순·정철 등의 당파를 배척하였으며, 일찍이 윤두수의 탐재(貪財)의 죄를 임금에게 직접 말하였다. 문집이 있다.

희량(希良) 1511∼1552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중순(仲淳), 하동군의 차남이다. 1534년(중종 29)에 사마가 되고, 1548년(명종 3)에 부묘별시(쯊廟別試) 병과에 등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고암리 선영측 손좌이다. 배위는 의인 재령강씨로 습독 이권(쬜權)의 딸이다. 슬하에 중광(重光) · 손광(孫光) 2남을 두었다.

희봉(喜鳳) 1821∼188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운서(雲瑞), 호는 죽헌(竹軒). 단산도정의 13대손 용원의 아들이다. 천성이 순하고 인정이 두텁고 덕행이 남보다 뛰어났다.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존경하여 향당이 추앙하여 존중히 여겼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지동동 안산 유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안동권씨로 규헌(圭憲)의 딸과 정부인 진주류씨로 상배(尙培)의 딸이다. 슬하에 종연(鍾淵) · 종한(鍾漢) · 종수(鍾洙) 3남을 두었다.

희석(喜錫) 1846∼192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우범(禹範), 단산도정의 13대손 용상의 아들이다. 증 통정대부가 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비하동 유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로 노기(魯基)의 딸과 숙부인 연안이씨로 창구(昌九)의 딸, 숙부인 경주김씨로 기주(杞柱)의 딸이다. 슬하에 종설(鍾卨) · 종익(鍾益) 2남을 두었다.

희성(希誠) 1531∼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경일(景一), 하동군의 7남이다. 진위장군이 되었다.
 묘소는 충남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이다. 배위는 영인 광주정씨로 장사랑 홍(洪)의 딸이다. 아들로 언광(彦光)이 있다.
희양(希讓) 1520∼1598    파명:경녕군(敬寧君)
  하동군의 5남이다. 음성 · 지례현감을 지내고 첨추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전북 장수군 천천면 박곡리 간좌이다. 배위는 장수황씨로 인의(引儀)의 딸이다. 슬하에 형광(絅光) · 성광(盛光) 2남을 두었다.

희온(希溫) 1510∼155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경순(景淳), 하동군의 장남이다. 1534년(중종 29)에 진사가 되고,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아우 희검(希儉)과 같이 급제했다. 배위는 숙인 안정나씨로 사직 옥(沃)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고암리 손좌이다.

희원(喜元) 1843∼1908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순거(舜擧), 호는 국천(菊泉). 용채(容采)의 아들로 용문(容文)에게 입양되었다. 1872년(고종 9) 경과정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김홍집·김영철·심상만 등과 함께 한권(翰圈)과 주천(注薦)을 거쳤다. 1876년(고종 13) 부사과를 지내고, 같은 해 10월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어 수찬을 거쳐 이듬해 교리가 되었다. 1885년(고종 22) 증광감시 초시 시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 이조참의가 되었고, 같은 해 동부승지·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905년(광무 9) 비서승이 되었고, 1907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