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회수(會壽) 1806∼187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14대손이며 양록정의 11대손으로 증 이조참의 세영(世榮)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숙부인 우주황씨로 대선(大銑)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한산이씨로 화재(華載)의 딸이다.
성균관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1900년(광무 4)에 특명으로 10대 방조(傍祖) 증 내부대신(內部大臣) 문경공(文敬公) 중호(仲虎)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으며 돈녕부 도정을 역임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 구곡 건좌이다. 석물이 있고 족질 봉조하(奉朝賀) 돈우(敦宇)가 묘지를 지었고, 일상(一相) 민영위(閔泳緯)가 묘갈명을 지었으며, 보국(輔國) 김재현(金在顯)이 글씨를 썼다.
성균관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1900년(광무 4)에 특명으로 10대 방조(傍祖) 증 내부대신(內部大臣) 문경공(文敬公) 중호(仲虎)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으며 돈녕부 도정을 역임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 구곡 건좌이다. 석물이 있고 족질 봉조하(奉朝賀) 돈우(敦宇)가 묘지를 지었고, 일상(一相) 민영위(閔泳緯)가 묘갈명을 지었으며, 보국(輔國) 김재현(金在顯)이 글씨를 썼다.
회순(會淳) 1811∼187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수(景壽), 호는 죽추(竹秋), 초휘는 종순(鐘淳). 대군의 15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1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원달(源達)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풍천임씨로 판서 희존(希存)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의령남씨로 근교(謹敎)의 딸과 정부인 남양홍씨로 익신(翼臣)의 딸이다.
1847년(헌종 13) 정시 별과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용담현령 · 홍문관 응교를 거쳐 1854년(철종 5) 경상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8개 지역의 불치(不治)수령을 문책할 것을 서계하였다. 그 후 사간원 사간을 거쳐 대사간 ·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71년(고종 8)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의 독금보관(讀金寶官)을 맡아 가자되었다. 이어 대종회(大宗會)시 부유사로서 거듭 가자되어 다음 해 정경인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그 후 지종정경(知宗正卿)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판부리에 있다.
자는 경수(景壽), 호는 죽추(竹秋), 초휘는 종순(鐘淳). 대군의 15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1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원달(源達)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풍천임씨로 판서 희존(希存)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의령남씨로 근교(謹敎)의 딸과 정부인 남양홍씨로 익신(翼臣)의 딸이다.
1847년(헌종 13) 정시 별과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용담현령 · 홍문관 응교를 거쳐 1854년(철종 5) 경상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8개 지역의 불치(不治)수령을 문책할 것을 서계하였다. 그 후 사간원 사간을 거쳐 대사간 ·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71년(고종 8)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의 독금보관(讀金寶官)을 맡아 가자되었다. 이어 대종회(大宗會)시 부유사로서 거듭 가자되어 다음 해 정경인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그 후 지종정경(知宗正卿)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판부리에 있다.
회승(會昇) 1801∼187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일(擎日), 대군의 14대손으로 선전관 문달(文達)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시작으로 여러 내 · 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승지에 올랐다. 1870년(고종 7) 6월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재임 중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광주 의곡에 있다.
자는 경일(擎日), 대군의 14대손으로 선전관 문달(文達)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시작으로 여러 내 · 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승지에 올랐다. 1870년(고종 7) 6월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재임 중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광주 의곡에 있다.
회정(會正) 1818∼188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숙(景淑), 초휘는 종정(鐘正). 대군의 15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1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원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풍천임씨로 판서 희존의 딸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의령남씨로 영교(泳敎)의 딸이다.
생원에 이어 1862년(철종 13) 춘당대에서 실시된 춘도기(春到記)의 부(賦)에서 직부전시(直赴殿試) 자격을 얻고 경과(慶科) 정시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고 주천(注薦)에 뽑혔다. 1866년(고종 3) 부청부사, 1870년(고종 7) 성균관 대사성, 1871년(고종 8) 이조참의 · 대사성, 1872년(고종 9) 병조참의, 1874년(고종 11) 도총관 동지사 · 공조판서를 지내고, 청나라에 다녀온 뒤인 1875년(고종 12) 한성부 판윤 · 강원도 관찰사 · 함경도 관찰사, 1878년(고종 15) 도총관 · 한성부 판윤 · 도총관, 1880년(고종 17) 한성부 판윤 · 도총관, 1882년(고종 19)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 발탁되어 예조판서가 되고,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에 임명되었으며 명성태황후의 국상발표에 신중론을 주장했다가 4일만에 예조판서에서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개차되고 임오군란 주동자 김장손(金長孫) 등에 대한 국문이 진행되었을 때에는 판의금부사로 보임되었다. 명성태황후의 의대장례문제(衣팿葬禮問題)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유학 김병설(金炳卨)의 탄핵을 받았으며 양사의 연차(聯箚)를 비롯한 계속되는 탄핵으로 마침내 강진현 고금도에 유배됐다. 1883년(고종 20) 2월 18일 향리로 방축되었으나 그 후 흥선대원군의 당여로 지목되어 조병창(趙秉昌) · 조우희(趙宇熙) · 임응준(任應準) 등과 함께 먼 섬에 위리안치할 계획이 그 후 사사(賜死)로 변경되고 그 뒤 1894년(고종 31) 칙령으로 복관됐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산리 손좌이다.
생원에 이어 1862년(철종 13) 춘당대에서 실시된 춘도기(春到記)의 부(賦)에서 직부전시(直赴殿試) 자격을 얻고 경과(慶科) 정시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고 주천(注薦)에 뽑혔다. 1866년(고종 3) 부청부사, 1870년(고종 7) 성균관 대사성, 1871년(고종 8) 이조참의 · 대사성, 1872년(고종 9) 병조참의, 1874년(고종 11) 도총관 동지사 · 공조판서를 지내고, 청나라에 다녀온 뒤인 1875년(고종 12) 한성부 판윤 · 강원도 관찰사 · 함경도 관찰사, 1878년(고종 15) 도총관 · 한성부 판윤 · 도총관, 1880년(고종 17) 한성부 판윤 · 도총관, 1882년(고종 19)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 발탁되어 예조판서가 되고,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에 임명되었으며 명성태황후의 국상발표에 신중론을 주장했다가 4일만에 예조판서에서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개차되고 임오군란 주동자 김장손(金長孫) 등에 대한 국문이 진행되었을 때에는 판의금부사로 보임되었다. 명성태황후의 의대장례문제(衣팿葬禮問題)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유학 김병설(金炳卨)의 탄핵을 받았으며 양사의 연차(聯箚)를 비롯한 계속되는 탄핵으로 마침내 강진현 고금도에 유배됐다. 1883년(고종 20) 2월 18일 향리로 방축되었으나 그 후 흥선대원군의 당여로 지목되어 조병창(趙秉昌) · 조우희(趙宇熙) · 임응준(任應準) 등과 함께 먼 섬에 위리안치할 계획이 그 후 사사(賜死)로 변경되고 그 뒤 1894년(고종 31) 칙령으로 복관됐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산리 손좌이다.
회준(會準) 1807∼187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이옥(以玉), 초휘는 진면(鎭冕). 대군의 14대손이며 파성군의 11대손으로 충달(忠達)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순창임씨 군수 경한(擎翰)의 딸이다. 백부 병사 인달(仁達)에게 입후되었으며 배위는 능성구씨 강( )의 딸이다.
별천으로 부장이 되고 1847년(헌종 13)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 · 외직을 역임한 다음, 전라좌 · 우수사를 거쳐 통정으로 승자되어 승지가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동평리 해좌이다.
자는 이옥(以玉), 초휘는 진면(鎭冕). 대군의 14대손이며 파성군의 11대손으로 충달(忠達)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순창임씨 군수 경한(擎翰)의 딸이다. 백부 병사 인달(仁達)에게 입후되었으며 배위는 능성구씨 강( )의 딸이다.
별천으로 부장이 되고 1847년(헌종 13)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 · 외직을 역임한 다음, 전라좌 · 우수사를 거쳐 통정으로 승자되어 승지가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동평리 해좌이다.
휘(彙) 1691∼177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12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8대손으로 문과급제로 판윤을 지낸 만선(萬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동복오씨로 현감 시겸(始謙)의 딸이다. 부인은 영월엄씨 첨정 우(遇)의 딸이다.
음직으로 별천되어 오위장으로 가승지(假承旨)로 차출되어 형조의 죄수 류사문(柳師文)을 석방한 공으로 당상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며 그 후 가자되어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금천 박달리 선영하이다.
음직으로 별천되어 오위장으로 가승지(假承旨)로 차출되어 형조의 죄수 류사문(柳師文)을 석방한 공으로 당상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며 그 후 가자되어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금천 박달리 선영하이다.
흠예(欽禮) 1523∼158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문보(文甫), 대군의 현손이며 금양부정(金壤副正)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인(愼人) 진천송씨로 성균관 생원 옹(雍)의 딸이고, 배위는 숙부인 언양김씨로 사인(士人) 수증(壽增)의 딸이다.
성품이 호방 활달하고 뜻을 낮추어 항상 겸손하며 의리를 소중히 하였으며, 1549년(명종 4) 무과에 급제하여 1554년(명종 9) 나주(羅州) 판관에 제수되어 호남지방 해안에서 왜구를 호탕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다음 해 특별히 군기시(軍器寺) 판관에 기용되었다. 1557년(명종 12) 신계(新溪) 현령에 부임 해서는 구월산(九月山) 등지를 소굴로하여 주변 고을에서 노략질을 하던 도적 임꺽정(林巨正) 일파를 소탕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봉산(鳳山) 군수에 영전되었고 아울러 1560년(명종 15) 정3품 당상인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었다. 그 후 외직으로 경원부사 및 김해부사와 내직인 오위(五衛)의 내금위장(內禁衛將), 겸사복장(兼司僕將)등 직을 역임하고 1562년(명종 17)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1565년(명종 20) 전라도 병마절도사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끝으로 신병이 깊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 선산이다.
성품이 호방 활달하고 뜻을 낮추어 항상 겸손하며 의리를 소중히 하였으며, 1549년(명종 4) 무과에 급제하여 1554년(명종 9) 나주(羅州) 판관에 제수되어 호남지방 해안에서 왜구를 호탕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다음 해 특별히 군기시(軍器寺) 판관에 기용되었다. 1557년(명종 12) 신계(新溪) 현령에 부임 해서는 구월산(九月山) 등지를 소굴로하여 주변 고을에서 노략질을 하던 도적 임꺽정(林巨正) 일파를 소탕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봉산(鳳山) 군수에 영전되었고 아울러 1560년(명종 15) 정3품 당상인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었다. 그 후 외직으로 경원부사 및 김해부사와 내직인 오위(五衛)의 내금위장(內禁衛將), 겸사복장(兼司僕將)등 직을 역임하고 1562년(명종 17)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1565년(명종 20) 전라도 병마절도사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끝으로 신병이 깊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 선산이다.
흥종(興宗) 1718∼177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성연(聖衍), 호는 한서(漢西), 대군의 11대손으로 현양(顯陽)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송심씨로 증 이참 당(쩫)의 딸이다.
1747년(영조 23)에 진사가 되고 1751년(영조 27)에 정시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고 이어서 정언 · 필선 · 이조정랑 등 여러 청현직을 역임했다. 1757년(영조 33) 10월 헌납이 되어 노론계 중신들의 비행을 지적, 호조판서 김상복(金相福) · 함경도 관찰사 조명정(趙明鼎) · 평양서윤 정극순(鄭克淳) 등을 탄핵, 일시에 파직케 했다. 1767년(영조 43) 6월 영광군수로 있을 때 전라도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조운선에 잡물을 함께 실어 운송한 사실이 호남어사 서명선(徐命善)에게 지적되어 수령으로서의 감독 소홀의 문책을 받고 위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다음 해에 풀려나 강계부사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 · 대사간을 거쳐 승정원 승지에 올랐다.
묘소는 인천시 서구 대곡동 선산 자좌이다.
1747년(영조 23)에 진사가 되고 1751년(영조 27)에 정시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고 이어서 정언 · 필선 · 이조정랑 등 여러 청현직을 역임했다. 1757년(영조 33) 10월 헌납이 되어 노론계 중신들의 비행을 지적, 호조판서 김상복(金相福) · 함경도 관찰사 조명정(趙明鼎) · 평양서윤 정극순(鄭克淳) 등을 탄핵, 일시에 파직케 했다. 1767년(영조 43) 6월 영광군수로 있을 때 전라도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조운선에 잡물을 함께 실어 운송한 사실이 호남어사 서명선(徐命善)에게 지적되어 수령으로서의 감독 소홀의 문책을 받고 위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다음 해에 풀려나 강계부사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 · 대사간을 거쳐 승정원 승지에 올랐다.
묘소는 인천시 서구 대곡동 선산 자좌이다.
희령(希齡) 1697∼177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수이(壽爾), 호는 약파(藥坡), 대군의 9대손으로 통덕랑 만중(萬重)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첨추 각(恪)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영민하였으며 학문에 힘썼고 효성과 우애도 지극하여 사우(師友)간에 칭송을 받았다. 서인과 남인, 소론과 노론 등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경전(經典)은 물론 사서(史書) · 의학 · 복서(卜筮) · 풍수지리까지 두루 정통했다. 특히 야사를 모으는 데 관심이 많아 조야의 사서와 명현들의 문집들을 널리 읽고 그 요점을 정리하여 <약파만록(藥坡漫錄)> 50책을 저술했다. 그 뒤 손자 한종(漢宗)이 <약파만록>을 증보하여 94권 60책으로 간행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고현리 송천에 있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영민하였으며 학문에 힘썼고 효성과 우애도 지극하여 사우(師友)간에 칭송을 받았다. 서인과 남인, 소론과 노론 등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경전(經典)은 물론 사서(史書) · 의학 · 복서(卜筮) · 풍수지리까지 두루 정통했다. 특히 야사를 모으는 데 관심이 많아 조야의 사서와 명현들의 문집들을 널리 읽고 그 요점을 정리하여 <약파만록(藥坡漫錄)> 50책을 저술했다. 그 뒤 손자 한종(漢宗)이 <약파만록>을 증보하여 94권 60책으로 간행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고현리 송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