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홍규(弘揆) 1637∼171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백수(伯綏), 모양군의 5대손 창근(昌根)의 아들이다. 가훈을 이어 받아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종족간에 화목하여 고향 사람들이 흠모하고 칭송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에 올랐다.
 묘소는 전북 장수군 계내면 신기촌 축좌이다. 배위는 숙인 함양여씨로 좌랑 위(渭)의 딸이다. 슬하에 정휘(挺輝) 1남을 두었다.

홍인(弘仁) 1538∼158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확이(擴而), 가림군의 증손 자(磁)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문과 갑과 아장(亞長)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持平)·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대사성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동천리 오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양천허씨로 참군 제(濟)의 딸이다. 슬하에 하(厦)를 두었다.

홍적(弘勣) ? ∼ ?    파명:경녕군(敬寧君)
  운산령의 아들이다. 벼슬은 소위장군에 이르렀다. 배위는 영인 고령박씨로 지평 세필(世弼)의 딸이다. 슬하에 종(悰)이 있다.

환(丸) ? ∼1592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의지(毅之), 호는 정곡(井谷). 복성군의 현손 억손(億孫)의 아들이다. 성품이 호탕 · 영매하고 의협심이 많았으며, 학문 또한 깊어 지략이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금산에 직접 부임하여 중봉(重峰) 조헌(趙憲) 등과 의거에 참여하여 도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9월 15일에 정읍현 사현에서 왜적과 역전분투하다 장렬히 순절하였다. 이곳에서 장사를 치러 사람들은 모두 의분동(義墳洞)이라고 하였으며 임금이 충절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의분동\'이라고 이름을 내려 대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묘소는 전북 정읍시 북면 의분동 신좌이고, 비석이 있다. 배위는 장성이씨로 사현 전투 때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 슬하에 대방(大邦) 1남을 두었다.

효전(孝全) 1696∼174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사집(士集), 모양군의 8대손 위상(緯常)의 아들이다. 증 통정대부 사복시정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강원면 법암 선영하이다. 배위는 해주정씨로 중성(重誠)의 딸이다. 슬하에 후백(後白) · 후담(後聃) 2남을 두었다.

후근(厚根) 1572∼1650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중회(仲晦), 호는 동촌(東村). 모양군의 현손 형광(亨光)의 아들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조부 찬성공 청담(淸潭)에게서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 번 경서를 배우면 암송해 잊어 버리지 않았고, 고금의 인간사를 담론할 때에는 옳고 그름을 완전히 듣고 판단을 내렸다. 음사(蔭仕)로 제릉참봉을 받고, 장흥으로 옮겨서는 생(牲)을 주관하고, 종부직장을 봉사하고, 외지로 임실현감을 맡았다. 조정에서는 사복주부판관이 되고, 다시 외지로 영동·합천·괴산·단양 등 7개 읍을 차례로 다스렸다. 읍을 다스릴 때 조부 찬성공은 여덟글자를 써주며 경계토록 하였으니, 그 내용은 “나라 걱정하기를 자기 집 걱정하듯 하고, 백성 사랑하기를 자기 자녀 사랑하듯이 하라” 라는 것이었다. 글의 좌측에 “선조를 욕되지 않도록 하려면 이와 같이 해야할 뿐이다” 라고 덧붙여 써놓고 치정하였다.
 통정대부에 올랐다. 말년에 충주 강가에서 시와 풍월을 읊었으며 1650년(효종 1)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법암 해좌이고, 석물이 갖춰져 있다. 배위는 숙부인 제주고씨와 숙부인 연안송씨로 장사랑 대립(大立)의 딸이다. 슬하에 기현(耆賢) · 기웅(耆雄) · 기선(耆善) · 기명(耆命) · 기인(耆仁) · 기남(耆南) 6남을 두었다.

훈(煇) 1575∼1659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회남(晦南), 단산도정의 현손 광욱(光郁)의 아들이다. 행 용양위 부호군을 지내고 절충장군에 이르렀다.
 묘소는 청주 강서면 정상촌 지장봉하 동록 술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청주한씨로 부사과 인(隣)의 딸이다. 슬하에 중배(重培) · 후배(厚培) · 영배(永培) 3남을 두었다.

희강(希剛) 1526∼ ?    파명:경녕군(敬寧君)
  야산군의 아들이다. 정략장군 충좌위 부사직을 하였다. 배위는 영인 초계정씨로 선교랑 후(珝)의 딸이다. 슬하에 사인(士仁) · 사의(士義) · 사례(士禮) 3남을 두었다.

희검(希儉) 1516∼1579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경질(景質), 호는 동고(東皐) 또는 국재(菊齋). 희온·희량의 아우이고, 희득의 형이다. 형 희온과 같은 날 과거에 급제했다. 생부는 하동군이며 신당군으로 입계하였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 · 정랑 · 교리 등을 거쳐 승지·오위장을 지내고 사간에 이르렀다. 이 때 왕실의 인척임을 내세워 횡포를 부리는 리량(李樑)을 탄핵하였다가 장단부사로 좌천되었으나, 리량이 쫓겨난 후 다시 우승지에 제수되었다. 1572년(선조 5) 진하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병조참의 · 대사헌을 거쳐 호조 · 병조 · 형조판서를 지내고, 지경연사를 지냈다. 인성왕후(仁聖王后 : 仁宗妃)가 승하했을 때 3년복상을 주장했다. 저서로 <동고집(東皐集)>이 있다.

희공(希恭) 1514∼ ?    파명:경녕군(敬寧君)
  하동군의 아들로, 건공장군에 이르렀다. 배위는 숙인 광산김씨로 충의위장 언충(彦忠)의 딸이다. 아들은 영광(榮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