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학의(鶴儀) 1809~187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구일(九一), 호는 운관(雲觀), 초휘는 문익(文翊). 대군의 16대손이며 밀산부수의 13대손으로 동지중추부사 응우(膺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벽진이씨로 정언 현(턁)의 딸이다. 배위는 공인 문소김씨로 학수(學壽)의 딸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여 겨우 5,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경사백가(經史百家)>를 한 번 보면 외워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시율(詩律)에 능하여 시를 지으면 자연스러우면서도 시재(詩才)가 뛰어난 작품이 많다. 시는 규제는 없으나 사기가 아름답고 의미가 청원하여 당 · 송의 시풍에 가깝다. 일찍이 자하(紫霞) 신위(申緯) · 종산(鐘山) 심영경(沈英慶) · 우촌(雨村) 남상교(南尙敎) · 우전(雨田) 정현덕(鄭顯德) · 가헌(可軒) 조운식(曺雲植) · 초사(蕉史) 홍건후(洪健厚) 등 유명한 문사와 창수(唱酬)하여 시축(詩軸)이 수십 권에 이르렀다. 우전 정현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갈 때 그의 시고 한 책을 가지고 가서 한림 용정(蓉亭) 조순(趙循)에게 평을 부탁하였는데 용정이 구절마다 비평을 하고 크게 칭찬하면서 총평을 쓰기를 “구양공(歐陽公)이 말하기를 문유삼다(文有三多)라 하였는데 이 분의 시가 바로 그렇다. 나라가 서로 달라 만나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시집은 193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유고 중 간추려 2책 4권이다. 권두에 서문이 있고, 권말에 발문이 있다. 시 · 만사 693수에 부록인 가장(家狀)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는 경북 영천시 범어동 금강 남록 임좌원이다. 은진송씨 조빈(朝彬)이 묘지를 짓고 영일정씨 태식(泰植)이 쓴 비가 있다. 유고로 <운관시집(雲觀詩集)> 2책 4권 외 편저로 <금편집(錦片集)>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여 겨우 5,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경사백가(經史百家)>를 한 번 보면 외워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시율(詩律)에 능하여 시를 지으면 자연스러우면서도 시재(詩才)가 뛰어난 작품이 많다. 시는 규제는 없으나 사기가 아름답고 의미가 청원하여 당 · 송의 시풍에 가깝다. 일찍이 자하(紫霞) 신위(申緯) · 종산(鐘山) 심영경(沈英慶) · 우촌(雨村) 남상교(南尙敎) · 우전(雨田) 정현덕(鄭顯德) · 가헌(可軒) 조운식(曺雲植) · 초사(蕉史) 홍건후(洪健厚) 등 유명한 문사와 창수(唱酬)하여 시축(詩軸)이 수십 권에 이르렀다. 우전 정현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갈 때 그의 시고 한 책을 가지고 가서 한림 용정(蓉亭) 조순(趙循)에게 평을 부탁하였는데 용정이 구절마다 비평을 하고 크게 칭찬하면서 총평을 쓰기를 “구양공(歐陽公)이 말하기를 문유삼다(文有三多)라 하였는데 이 분의 시가 바로 그렇다. 나라가 서로 달라 만나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시집은 193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유고 중 간추려 2책 4권이다. 권두에 서문이 있고, 권말에 발문이 있다. 시 · 만사 693수에 부록인 가장(家狀)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는 경북 영천시 범어동 금강 남록 임좌원이다. 은진송씨 조빈(朝彬)이 묘지를 짓고 영일정씨 태식(泰植)이 쓴 비가 있다. 유고로 <운관시집(雲觀詩集)> 2책 4권 외 편저로 <금편집(錦片集)>이 있다.
한종(漢宗) 1765∼184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치조(穉朝), 호는 현은(玄隱), 대군의 11대손이며 명원군의 8대손으로 성헌공 후연(後衍)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의령남씨 찬로(纘老)의 딸이다. 배위는 죽산안씨, 반남박씨 및 양천허씨 순(淳)의 딸이다.
7세에 아버지 성헌공을 여의고 할아버지 약파공 밑에서 12세가 되는 1776년(영조 52)까지 훈도를 받았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만록(漫錄)>의 속편을 쓰려다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벼슬길을 버리고 집필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가 쓴 우리 나라 역대의 사실(史實)을 정사와 야사에서 채록하여 편년체와 기년체를 혼용하여 엮은 숙종조까지의 사실 40권과 경종 · 영조 때의 사실을 할아버지의 뜻에 맞게 추가하여 94권 60책으로 보완 · 편찬한 <약파만록>을 1832년(순조 32)에 필사본으로 펴냈다.
<약파만록>은 서두에 고모부 신협(申協)과 자신의 서문 그리고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권비응(權丕應)과 자신의 발문(跋文)을 실었고 권1에 동국산천래맥(東國山川來脈) · 동국역대강역(東國歷代疆域) · 동국역대국토(東國歷代國土)를, 권2에 고려통합 · 해동명신(海東名臣)을, 권3에 아국강역 · 한성부, 선원선계와 태조고황제의 왕업조기(王業肇基), 권4부터 권94까지는 태조고황제부터 영조대왕까지의 기사(紀事)를 수록하고 있다. 공은 <만록>을 펴내고 12년이 되는 1843년(헌종 9) 8월 6일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온릉 입구 동동 경좌이다. 유저로 <약파만록(경종∼영조까지의 사실)> 20책이 있다.
7세에 아버지 성헌공을 여의고 할아버지 약파공 밑에서 12세가 되는 1776년(영조 52)까지 훈도를 받았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만록(漫錄)>의 속편을 쓰려다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벼슬길을 버리고 집필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가 쓴 우리 나라 역대의 사실(史實)을 정사와 야사에서 채록하여 편년체와 기년체를 혼용하여 엮은 숙종조까지의 사실 40권과 경종 · 영조 때의 사실을 할아버지의 뜻에 맞게 추가하여 94권 60책으로 보완 · 편찬한 <약파만록>을 1832년(순조 32)에 필사본으로 펴냈다.
<약파만록>은 서두에 고모부 신협(申協)과 자신의 서문 그리고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권비응(權丕應)과 자신의 발문(跋文)을 실었고 권1에 동국산천래맥(東國山川來脈) · 동국역대강역(東國歷代疆域) · 동국역대국토(東國歷代國土)를, 권2에 고려통합 · 해동명신(海東名臣)을, 권3에 아국강역 · 한성부, 선원선계와 태조고황제의 왕업조기(王業肇基), 권4부터 권94까지는 태조고황제부터 영조대왕까지의 기사(紀事)를 수록하고 있다. 공은 <만록>을 펴내고 12년이 되는 1843년(헌종 9) 8월 6일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온릉 입구 동동 경좌이다. 유저로 <약파만록(경종∼영조까지의 사실)> 20책이 있다.
함형(咸亨) 1550∼158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 [선조 19)]
자는 평숙(平叔), 호는 천산재(天山齋), 대군의 6대손이며 장양도정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식(拭)이고 어머니는 정부인 한양조씨로 증 승지 수곤(壽昆)의 딸이다.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1569년(선조 2) 3월 순천에 머물다 퇴계 문하에 들어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 등 <심경(心經)>에 대하여 깊이 담론하고 1570년(선조 3) 초학자를 위한 <심경질의서-심경강록(心經講錄)>을 펴냈다. 그 후 <심경강록>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한 3권 1책의 <심경표제(心經標題)>를 저술했다. 같은 해 아버지 참판공이 동지부사로 연경에 갈 때 수행했다. <퇴계문집> 중 천산재에게 준 선생의 서간 중에 <여리평숙(與李平叔)>이란 훈서(訓書 :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도차밀계간(道次密啓看)>이 있다. 이 훈서는 천산재와 부인 사이의 금실이 조화롭지 못함을 타이른 밀계였으며 이 밀계로 벌어졌던 부부 사이가 다시금 아물게 되었고, 선생이 작고하자 천산재의 부인이 심상(心喪) 3년을 했다고 전한다.
묘는 경기도 성남시 도촌동 뒷산 해좌에 있다. 유저로는 <심경강록> 1책 · <심경표제> 1책(규장각 소장) · <천산재집>(실전) 등이 있다.
자는 평숙(平叔), 호는 천산재(天山齋), 대군의 6대손이며 장양도정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식(拭)이고 어머니는 정부인 한양조씨로 증 승지 수곤(壽昆)의 딸이다.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1569년(선조 2) 3월 순천에 머물다 퇴계 문하에 들어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 등 <심경(心經)>에 대하여 깊이 담론하고 1570년(선조 3) 초학자를 위한 <심경질의서-심경강록(心經講錄)>을 펴냈다. 그 후 <심경강록>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한 3권 1책의 <심경표제(心經標題)>를 저술했다. 같은 해 아버지 참판공이 동지부사로 연경에 갈 때 수행했다. <퇴계문집> 중 천산재에게 준 선생의 서간 중에 <여리평숙(與李平叔)>이란 훈서(訓書 :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도차밀계간(道次密啓看)>이 있다. 이 훈서는 천산재와 부인 사이의 금실이 조화롭지 못함을 타이른 밀계였으며 이 밀계로 벌어졌던 부부 사이가 다시금 아물게 되었고, 선생이 작고하자 천산재의 부인이 심상(心喪) 3년을 했다고 전한다.
묘는 경기도 성남시 도촌동 뒷산 해좌에 있다. 유저로는 <심경강록> 1책 · <심경표제> 1책(규장각 소장) · <천산재집>(실전) 등이 있다.
항의(恒儀) 1846∼192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덕(敬德), 대군의 16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2대손이다. 증 호참 학우(鶴宇)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원주원씨로 경희(景希)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진주정씨로 우식(禹植)의 딸과 정부인 전의이씨로 종덕(從悳)의 딸, 그리고 정부인 경주김씨이다.
음직으로 별천되어 내외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878년(고종 15) 5월 흥해군수 때 치적이 인정되어 승서되었다. 1893년(고종 30) 5월 송기교(松杞橋)에서 영도교(永都橋)까지 준설공사에 참여한 공으로 가자되어 같은 해 11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며 1896년 3월에는 진주부 관찰사로 종2품 칙임관 4등에 올랐다. 같은 해 8월에는 경상남도 관찰사로 옮겼으며 1897년(광무 1) 5월에는 중추원 의관 1등에 서임되었다가 1904년(광무 8)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우두산하 정좌이다.
음직으로 별천되어 내외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878년(고종 15) 5월 흥해군수 때 치적이 인정되어 승서되었다. 1893년(고종 30) 5월 송기교(松杞橋)에서 영도교(永都橋)까지 준설공사에 참여한 공으로 가자되어 같은 해 11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며 1896년 3월에는 진주부 관찰사로 종2품 칙임관 4등에 올랐다. 같은 해 8월에는 경상남도 관찰사로 옮겼으며 1897년(광무 1) 5월에는 중추원 의관 1등에 서임되었다가 1904년(광무 8)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우두산하 정좌이다.
행연(行淵) 1786∼186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중원(仲源), 호는 안명재(安命齋), 대군의 14대손이며 춘성정의 11대손으로 증 지평 사석(師錫)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화류씨 학성(學性)의 딸이다. 배위는 삭녕최씨 익효(翊孝)의 딸이다.
1827년(순조 27) 과시에 응시했다 실패하자 벼슬길을 버리고 성명(性命)을 닦는 학문에 뜻을 두고 성현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험하여 진실하게 보고 또 행하고자 하였다. 1839년(헌종 5) 조정에서 통덕랑으로 공릉참봉을 제수하였으나 고령의 노모가 있어 나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1845년(헌종 11) 호남의 유림에서 조중봉(趙重峯) · 김신독재(金愼獨齋) · 김청음(金淸陰) 3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는 건의안을 초안했고, 산질(散帙)된 천묵재(天默齋) 리상형(李尙馨) 유문을 수습해서 하나의 유고로 집성하였다. 유고 중에는 성(性)에 대하여, 이기(二氣) 오행(五行)의 정신으로 이 성(性)을 받았으며 그 이(理)만을 한마디로 이르면 순진(純眞)이다 하였고, 정(情)에 대하여서는 심기(心氣)가 감통(感通)하여 성리(性理)가 일어나니 일어날 때의 명목(名目)이 바로 정(情)이다 하였으며, 마음에 대해서는 신기롭고 현묘한 공용(功用)이 여기에서 나오니 한 몸을 주재하고 성(性)과 정(情)을 통섭(統攝)한다는 이론들이 들어 있다.
묘소는 전북 임실군 성수면 덕치에 있다. 유고로 <안명재집> 1책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1827년(순조 27) 과시에 응시했다 실패하자 벼슬길을 버리고 성명(性命)을 닦는 학문에 뜻을 두고 성현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험하여 진실하게 보고 또 행하고자 하였다. 1839년(헌종 5) 조정에서 통덕랑으로 공릉참봉을 제수하였으나 고령의 노모가 있어 나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1845년(헌종 11) 호남의 유림에서 조중봉(趙重峯) · 김신독재(金愼獨齋) · 김청음(金淸陰) 3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는 건의안을 초안했고, 산질(散帙)된 천묵재(天默齋) 리상형(李尙馨) 유문을 수습해서 하나의 유고로 집성하였다. 유고 중에는 성(性)에 대하여, 이기(二氣) 오행(五行)의 정신으로 이 성(性)을 받았으며 그 이(理)만을 한마디로 이르면 순진(純眞)이다 하였고, 정(情)에 대하여서는 심기(心氣)가 감통(感通)하여 성리(性理)가 일어나니 일어날 때의 명목(名目)이 바로 정(情)이다 하였으며, 마음에 대해서는 신기롭고 현묘한 공용(功用)이 여기에서 나오니 한 몸을 주재하고 성(性)과 정(情)을 통섭(統攝)한다는 이론들이 들어 있다.
묘소는 전북 임실군 성수면 덕치에 있다. 유고로 <안명재집> 1책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현달(顯達) 1591∼164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7대손이며 강성도정의 현손으로 증 우의정 중기(重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언양김씨로 호련(戶練)의 딸이다. 백부 중강(重綱)에게 입계했다.
별천으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다가 가자되어 1628년(인조 6) 의주부윤에 제수되었으나, 의주는 국가의 서문(西門)으로 위임받은 직임이 중차대하여 곤수(쥀帥 : 장수)와 다름없는 자리이므로 경험이 부족한 신임 부윤으로서는 이 직임을 완수할 수 없다는 사헌부의 수차례에 걸친 건의에 따라 체임되었다. 1637년(인조 15) 4월 이조의 건의로 남한산성 출입 때 호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고, 동 14일 북병사에 제수되었다. 1645년(인조 23)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광주 선산 유좌이다.
별천으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다가 가자되어 1628년(인조 6) 의주부윤에 제수되었으나, 의주는 국가의 서문(西門)으로 위임받은 직임이 중차대하여 곤수(쥀帥 : 장수)와 다름없는 자리이므로 경험이 부족한 신임 부윤으로서는 이 직임을 완수할 수 없다는 사헌부의 수차례에 걸친 건의에 따라 체임되었다. 1637년(인조 15) 4월 이조의 건의로 남한산성 출입 때 호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고, 동 14일 북병사에 제수되었다. 1645년(인조 23)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광주 선산 유좌이다.
현묵(顯默) 1748∼181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성간(聖簡), 대군의 13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9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숙부인 밀양박씨로 종윤(宗閏)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청풍김씨로 판서 익휴(翊休)의 딸이다.
1773년(영조 49) 임금이 금상문에 나와 `칠석(七夕)\'이란 글제를 놓고 실시한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하였고, 1774년(영조 50) 식년 전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다음 해 실시된 응제에서도 수석하여 참상관인 6품으로 승진했다. 1788년(정조 22) 문묘제향 때 사성으로 헌관 봉무(奉務)를 소홀히 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당상인 승지에 승계되고 1817년(순조 17)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판부리 경좌에 있다.
1773년(영조 49) 임금이 금상문에 나와 `칠석(七夕)\'이란 글제를 놓고 실시한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하였고, 1774년(영조 50) 식년 전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다음 해 실시된 응제에서도 수석하여 참상관인 6품으로 승진했다. 1788년(정조 22) 문묘제향 때 사성으로 헌관 봉무(奉務)를 소홀히 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당상인 승지에 승계되고 1817년(순조 17)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판부리 경좌에 있다.
현택(顯宅) 1746∼181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백(斯白), 대군의 12대손이며 파성군의 9대손으로 군수 숭(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인 여산송씨로 홍(珙)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연일정씨로 영장 낙여(洛汝)의 딸과 정부인 청송심씨로 백진(白鎭)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 · 외직을 거쳐 1792년(정조 16) 경원부사가 되었다. 다음 해 홍주영장을 역임한 다음 1799년(정조 23)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고 1809년(순조 9)에는 제주목사로 영전되었다. 제주목사 재임시 독직에 연루되어 파직, 유배되었으나 풀려나서 그 후 탕척(蕩滌 : 좌명을 깨끗이 씻어줌)됐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 청계산 의무에 있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 · 외직을 거쳐 1792년(정조 16) 경원부사가 되었다. 다음 해 홍주영장을 역임한 다음 1799년(정조 23)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고 1809년(순조 9)에는 제주목사로 영전되었다. 제주목사 재임시 독직에 연루되어 파직, 유배되었으나 풀려나서 그 후 탕척(蕩滌 : 좌명을 깨끗이 씻어줌)됐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 청계산 의무에 있다.
형상(衡祥) 1653∼173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 [(영조 9)]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 대군의 10대손이며 밀산부수의 7대손이고 증 호조참판 주하(柱廈)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파평윤씨로 진사 세구(世耉)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은진송씨로 통덕랑 지규(之奎)의 딸이다.
문신이며 실학자로 1677년(숙종 3) 사마시를 거쳐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조정랑을 지내다가 덕유산의 도적을 토평하고자 문 · 무를 겸비한 인물로 천거되어 금산군수로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성주 · 청주 · 동래 · 양주 · 경주부윤을 지내고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가 되어 3읍(邑)의 향교를 수리하고 덕망 높은 선비를 뽑아 교학(敎學)을 담당케 했으며, 고(高) · 부(夫) · 양(良 : 粱)씨의 삼성사(三姓祠)를 건립하는 한편 미풍양속을 장려하여 송덕비(頌德碑 : 삼성사 경내에 현존)가 세워졌다. 그 후 장례원 판결사에 두 번 제수되고 1727년(영조 3) 호조참의에 임명되는 등 여러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고 영천에 호연정(浩然亭)을 세워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후학을 양성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영조대왕의 밀지(密旨)로 경상도 호소사가 되었으나 무고(誣告)로 한 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르는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11좌(座)나 세워졌는데 그 중 동래는 유비(鍮碑)이다. 1796년(정조 20) 별세 60년만에 청백리에 천거되고 영천의 성남서원과 제주의 귤림사(橘林祠 : 사액사당)와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동 뒤 묘좌에 있다. 병와공이 지은 호연정(浩然亭 : 현 경북 영천시 성내동 금호강 상류에 위치)은 지금까지 남아 있고, 1986년 호연정 경내에 유고각(遺稿閣)이 건립되었다. 1731년(영조 7) 박상기(薄相記)와 함께 그린 심의 차림의 자화상인 영정이 있다. <병와집(甁窩集)> ·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등 유저로 총 86종 254책 6첩이 전하며, 여러 유품들이 남아 있다.
공의 유고는 1979년 2월 8일 정부에서 보물 제652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이를 영인으로 완간하였다.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 대군의 10대손이며 밀산부수의 7대손이고 증 호조참판 주하(柱廈)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파평윤씨로 진사 세구(世耉)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은진송씨로 통덕랑 지규(之奎)의 딸이다.
문신이며 실학자로 1677년(숙종 3) 사마시를 거쳐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조정랑을 지내다가 덕유산의 도적을 토평하고자 문 · 무를 겸비한 인물로 천거되어 금산군수로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성주 · 청주 · 동래 · 양주 · 경주부윤을 지내고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가 되어 3읍(邑)의 향교를 수리하고 덕망 높은 선비를 뽑아 교학(敎學)을 담당케 했으며, 고(高) · 부(夫) · 양(良 : 粱)씨의 삼성사(三姓祠)를 건립하는 한편 미풍양속을 장려하여 송덕비(頌德碑 : 삼성사 경내에 현존)가 세워졌다. 그 후 장례원 판결사에 두 번 제수되고 1727년(영조 3) 호조참의에 임명되는 등 여러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고 영천에 호연정(浩然亭)을 세워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후학을 양성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영조대왕의 밀지(密旨)로 경상도 호소사가 되었으나 무고(誣告)로 한 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르는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11좌(座)나 세워졌는데 그 중 동래는 유비(鍮碑)이다. 1796년(정조 20) 별세 60년만에 청백리에 천거되고 영천의 성남서원과 제주의 귤림사(橘林祠 : 사액사당)와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동 뒤 묘좌에 있다. 병와공이 지은 호연정(浩然亭 : 현 경북 영천시 성내동 금호강 상류에 위치)은 지금까지 남아 있고, 1986년 호연정 경내에 유고각(遺稿閣)이 건립되었다. 1731년(영조 7) 박상기(薄相記)와 함께 그린 심의 차림의 자화상인 영정이 있다. <병와집(甁窩集)> ·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등 유저로 총 86종 254책 6첩이 전하며, 여러 유품들이 남아 있다.
공의 유고는 1979년 2월 8일 정부에서 보물 제652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이를 영인으로 완간하였다.
혼(渾) 1543∼159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5대손이며 낙안군의 손자 금양부정의 둘째 아들 증 호조참판 원례(元禮)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양조씨로 증 참판 기(機)의 딸이고, 배위는 정부인 장수황씨이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한 후 1588년(선조 21) 단천(端川) 군수를 비롯한 내외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경원(慶源) 부사 재직중인 1589년(선조 22) 1월 무신(武臣)들을 순서에 의하지 않고 승자시켜 수 · 병사에 기용하는 특예가 시행될 때 유홍(兪泓 : 좌찬성때)의 추천을 받았다. 그 후 부령부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및 제주목사를 차례로 역임한 다음 함경도 남병사에 부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5월 휘하 장병을 이끌고 양주에 이르러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의 병력과 합세, 양주의 해령(蟹嶺 : 속칭 게너미 고개)에서 왜적을 요격하여 적 70여급을 참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1592년(선조 25) 6월 12일 관북방면으로 진격중인 왜장 가도(加藤) 및 모리(毛利)의 공격에 밀려 방어하던 철영(鐵嶺)을 버리고 갑산(申山)으로 퇴각하다가 기춘연(奇春年), 박연문(朴延文) 등 부적난민(附敵亂民)들의 기습을 받고 싸우다가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후사가 끊겼다.
1900년(광무 4) 특명으로 장양도정 주(?) 손자 현감 양(楊)의 9대손 회덕(會悳)에게 봉사케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 선산 자좌이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한 후 1588년(선조 21) 단천(端川) 군수를 비롯한 내외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경원(慶源) 부사 재직중인 1589년(선조 22) 1월 무신(武臣)들을 순서에 의하지 않고 승자시켜 수 · 병사에 기용하는 특예가 시행될 때 유홍(兪泓 : 좌찬성때)의 추천을 받았다. 그 후 부령부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및 제주목사를 차례로 역임한 다음 함경도 남병사에 부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5월 휘하 장병을 이끌고 양주에 이르러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의 병력과 합세, 양주의 해령(蟹嶺 : 속칭 게너미 고개)에서 왜적을 요격하여 적 70여급을 참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1592년(선조 25) 6월 12일 관북방면으로 진격중인 왜장 가도(加藤) 및 모리(毛利)의 공격에 밀려 방어하던 철영(鐵嶺)을 버리고 갑산(申山)으로 퇴각하다가 기춘연(奇春年), 박연문(朴延文) 등 부적난민(附敵亂民)들의 기습을 받고 싸우다가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후사가 끊겼다.
1900년(광무 4) 특명으로 장양도정 주(?) 손자 현감 양(楊)의 9대손 회덕(會悳)에게 봉사케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 선산 자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