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학의(鶴儀) 1809~187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구일(九一), 호는 운관(雲觀), 초휘는 문익(文翊). 대군의 16대손이며 밀산부수의 13대손으로 동지중추부사 응우(膺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벽진이씨로 정언 현(턁)의 딸이다. 배위는 공인 문소김씨로 학수(學壽)의 딸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여 겨우 5,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경사백가(經史百家)>를 한 번 보면 외워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시율(詩律)에 능하여 시를 지으면 자연스러우면서도 시재(詩才)가 뛰어난 작품이 많다. 시는 규제는 없으나 사기가 아름답고 의미가 청원하여 당 · 송의 시풍에 가깝다. 일찍이 자하(紫霞) 신위(申緯) · 종산(鐘山) 심영경(沈英慶) · 우촌(雨村) 남상교(南尙敎) · 우전(雨田) 정현덕(鄭顯德) · 가헌(可軒) 조운식(曺雲植) · 초사(蕉史) 홍건후(洪健厚) 등 유명한 문사와 창수(唱酬)하여 시축(詩軸)이 수십 권에 이르렀다. 우전 정현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갈 때 그의 시고 한 책을 가지고 가서 한림 용정(蓉亭) 조순(趙循)에게 평을 부탁하였는데 용정이 구절마다 비평을 하고 크게 칭찬하면서 총평을 쓰기를 “구양공(歐陽公)이 말하기를 문유삼다(文有三多)라 하였는데 이 분의 시가 바로 그렇다. 나라가 서로 달라 만나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시집은 193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유고 중 간추려 2책 4권이다. 권두에 서문이 있고, 권말에 발문이 있다. 시 · 만사 693수에 부록인 가장(家狀)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는 경북 영천시 범어동 금강 남록 임좌원이다. 은진송씨 조빈(朝彬)이 묘지를 짓고 영일정씨 태식(泰植)이 쓴 비가 있다. 유고로 <운관시집(雲觀詩集)> 2책 4권 외 편저로 <금편집(錦片集)>이 있다.
한종(漢宗) 1765∼184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치조(穉朝), 호는 현은(玄隱), 대군의 11대손이며 명원군의 8대손으로 성헌공 후연(後衍)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의령남씨 찬로(纘老)의 딸이다. 배위는 죽산안씨, 반남박씨 및 양천허씨 순(淳)의 딸이다.
 7세에 아버지 성헌공을 여의고 할아버지 약파공 밑에서 12세가 되는 1776년(영조 52)까지 훈도를 받았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만록(漫錄)>의 속편을 쓰려다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벼슬길을 버리고 집필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가 쓴 우리 나라 역대의 사실(史實)을 정사와 야사에서 채록하여 편년체와 기년체를 혼용하여 엮은 숙종조까지의 사실 40권과 경종 · 영조 때의 사실을 할아버지의 뜻에 맞게 추가하여 94권 60책으로 보완 · 편찬한 <약파만록>을 1832년(순조 32)에 필사본으로 펴냈다.
 <약파만록>은 서두에 고모부 신협(申協)과 자신의 서문 그리고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권비응(權丕應)과 자신의 발문(跋文)을 실었고 권1에 동국산천래맥(東國山川來脈) · 동국역대강역(東國歷代疆域) · 동국역대국토(東國歷代國土)를, 권2에 고려통합 · 해동명신(海東名臣)을, 권3에 아국강역 · 한성부, 선원선계와 태조고황제의 왕업조기(王業肇基), 권4부터 권94까지는 태조고황제부터 영조대왕까지의 기사(紀事)를 수록하고 있다. 공은 <만록>을 펴내고 12년이 되는 1843년(헌종 9) 8월 6일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온릉 입구 동동 경좌이다. 유저로 <약파만록(경종∼영조까지의 사실)> 20책이 있다.
함형(咸亨) 1550∼158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 [선조 19)]
 자는 평숙(平叔), 호는 천산재(天山齋), 대군의 6대손이며 장양도정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식(拭)이고 어머니는 정부인 한양조씨로 증 승지 수곤(壽昆)의 딸이다.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1569년(선조 2) 3월 순천에 머물다 퇴계 문하에 들어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 등 <심경(心經)>에 대하여 깊이 담론하고 1570년(선조 3) 초학자를 위한 <심경질의서-심경강록(心經講錄)>을 펴냈다. 그 후 <심경강록>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한 3권 1책의 <심경표제(心經標題)>를 저술했다. 같은 해 아버지 참판공이 동지부사로 연경에 갈 때 수행했다. <퇴계문집> 중 천산재에게 준 선생의 서간 중에 <여리평숙(與李平叔)>이란 훈서(訓書 :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도차밀계간(道次密啓看)>이 있다. 이 훈서는 천산재와 부인 사이의 금실이 조화롭지 못함을 타이른 밀계였으며 이 밀계로 벌어졌던 부부 사이가 다시금 아물게 되었고, 선생이 작고하자 천산재의 부인이 심상(心喪) 3년을 했다고 전한다.
 묘는 경기도 성남시 도촌동 뒷산 해좌에 있다. 유저로는 <심경강록> 1책 · <심경표제> 1책(규장각 소장) · <천산재집>(실전) 등이 있다.
항의(恒儀) 1846∼192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덕(敬德), 대군의 16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2대손이다. 증 호참 학우(鶴宇)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원주원씨로 경희(景希)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진주정씨로 우식(禹植)의 딸과 정부인 전의이씨로 종덕(從悳)의 딸, 그리고 정부인 경주김씨이다.
 음직으로 별천되어 내외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878년(고종 15) 5월 흥해군수 때 치적이 인정되어 승서되었다. 1893년(고종 30) 5월 송기교(松杞橋)에서 영도교(永都橋)까지 준설공사에 참여한 공으로 가자되어 같은 해 11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며 1896년 3월에는 진주부 관찰사로 종2품 칙임관 4등에 올랐다. 같은 해 8월에는 경상남도 관찰사로 옮겼으며 1897년(광무 1) 5월에는 중추원 의관 1등에 서임되었다가 1904년(광무 8)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우두산하 정좌이다.
행연(行淵) 1786∼186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중원(仲源), 호는 안명재(安命齋), 대군의 14대손이며 춘성정의 11대손으로 증 지평 사석(師錫)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화류씨 학성(學性)의 딸이다. 배위는 삭녕최씨 익효(翊孝)의 딸이다.
 1827년(순조 27) 과시에 응시했다 실패하자 벼슬길을 버리고 성명(性命)을 닦는 학문에 뜻을 두고 성현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험하여 진실하게 보고 또 행하고자 하였다. 1839년(헌종 5) 조정에서 통덕랑으로 공릉참봉을 제수하였으나 고령의 노모가 있어 나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1845년(헌종 11) 호남의 유림에서 조중봉(趙重峯) · 김신독재(金愼獨齋) · 김청음(金淸陰) 3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는 건의안을 초안했고, 산질(散帙)된 천묵재(天默齋) 리상형(李尙馨) 유문을 수습해서 하나의 유고로 집성하였다. 유고 중에는 성(性)에 대하여, 이기(二氣) 오행(五行)의 정신으로 이 성(性)을 받았으며 그 이(理)만을 한마디로 이르면 순진(純眞)이다 하였고, 정(情)에 대하여서는 심기(心氣)가 감통(感通)하여 성리(性理)가 일어나니 일어날 때의 명목(名目)이 바로 정(情)이다 하였으며, 마음에 대해서는 신기롭고 현묘한 공용(功用)이 여기에서 나오니 한 몸을 주재하고 성(性)과 정(情)을 통섭(統攝)한다는 이론들이 들어 있다.
 묘소는 전북 임실군 성수면 덕치에 있다. 유고로 <안명재집> 1책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현달(顯達) 1591∼164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7대손이며 강성도정의 현손으로 증 우의정 중기(重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언양김씨로 호련(戶練)의 딸이다. 백부 중강(重綱)에게 입계했다.
 별천으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다가 가자되어 1628년(인조 6) 의주부윤에 제수되었으나, 의주는 국가의 서문(西門)으로 위임받은 직임이 중차대하여 곤수(쥀帥 : 장수)와 다름없는 자리이므로 경험이 부족한 신임 부윤으로서는 이 직임을 완수할 수 없다는 사헌부의 수차례에 걸친 건의에 따라 체임되었다. 1637년(인조 15) 4월 이조의 건의로 남한산성 출입 때 호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고, 동 14일 북병사에 제수되었다. 1645년(인조 23)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광주 선산 유좌이다.
현묵(顯默) 1748∼181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성간(聖簡), 대군의 13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9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숙부인 밀양박씨로 종윤(宗閏)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청풍김씨로 판서 익휴(翊休)의 딸이다.
 1773년(영조 49) 임금이 금상문에 나와 `칠석(七夕)\'이란 글제를 놓고 실시한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하였고, 1774년(영조 50) 식년 전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다음 해 실시된 응제에서도 수석하여 참상관인 6품으로 승진했다. 1788년(정조 22) 문묘제향 때 사성으로 헌관 봉무(奉務)를 소홀히 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당상인 승지에 승계되고 1817년(순조 17)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판부리 경좌에 있다.
현택(顯宅) 1746∼181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백(斯白), 대군의 12대손이며 파성군의 9대손으로 군수 숭(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인 여산송씨로 홍(珙)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연일정씨로 영장 낙여(洛汝)의 딸과 정부인 청송심씨로 백진(白鎭)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 · 외직을 거쳐 1792년(정조 16) 경원부사가 되었다. 다음 해 홍주영장을 역임한 다음 1799년(정조 23)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고 1809년(순조 9)에는 제주목사로 영전되었다. 제주목사 재임시 독직에 연루되어 파직, 유배되었으나 풀려나서 그 후 탕척(蕩滌 : 좌명을 깨끗이 씻어줌)됐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 청계산 의무에 있다.
형상(衡祥) 1653∼173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 [(영조 9)]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 대군의 10대손이며 밀산부수의 7대손이고 증 호조참판 주하(柱廈)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파평윤씨로 진사 세구(世耉)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은진송씨로 통덕랑 지규(之奎)의 딸이다.
 문신이며 실학자로 1677년(숙종 3) 사마시를 거쳐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조정랑을 지내다가 덕유산의 도적을 토평하고자 문 · 무를 겸비한 인물로 천거되어 금산군수로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성주 · 청주 · 동래 · 양주 · 경주부윤을 지내고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가 되어 3읍(邑)의 향교를 수리하고 덕망 높은 선비를 뽑아 교학(敎學)을 담당케 했으며, 고(高) · 부(夫) · 양(良 : 粱)씨의 삼성사(三姓祠)를 건립하는 한편 미풍양속을 장려하여 송덕비(頌德碑 : 삼성사 경내에 현존)가 세워졌다. 그 후 장례원 판결사에 두 번 제수되고 1727년(영조 3) 호조참의에 임명되는 등 여러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고 영천에 호연정(浩然亭)을 세워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후학을 양성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영조대왕의 밀지(密旨)로 경상도 호소사가 되었으나 무고(誣告)로 한 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르는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11좌(座)나 세워졌는데 그 중 동래는 유비(鍮碑)이다. 1796년(정조 20) 별세 60년만에 청백리에 천거되고 영천의 성남서원과 제주의 귤림사(橘林祠 : 사액사당)와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동 뒤 묘좌에 있다. 병와공이 지은 호연정(浩然亭 : 현 경북 영천시 성내동 금호강 상류에 위치)은 지금까지 남아 있고, 1986년 호연정 경내에 유고각(遺稿閣)이 건립되었다. 1731년(영조 7) 박상기(薄相記)와 함께 그린 심의 차림의 자화상인 영정이 있다. <병와집(甁窩集)> ·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등 유저로 총 86종 254책 6첩이 전하며, 여러 유품들이 남아 있다.
 공의 유고는 1979년 2월 8일 정부에서 보물 제652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이를 영인으로 완간하였다.
혼(渾) 1543∼159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5대손이며 낙안군의 손자 금양부정의 둘째 아들 증 호조참판 원례(元禮)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양조씨로 증 참판 기(機)의 딸이고, 배위는 정부인 장수황씨이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한 후 1588년(선조 21) 단천(端川) 군수를 비롯한 내외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경원(慶源) 부사 재직중인 1589년(선조 22) 1월 무신(武臣)들을 순서에 의하지 않고 승자시켜 수 · 병사에 기용하는 특예가 시행될 때 유홍(兪泓 : 좌찬성때)의 추천을 받았다. 그 후 부령부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및 제주목사를 차례로 역임한 다음 함경도 남병사에 부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5월 휘하 장병을 이끌고 양주에 이르러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의 병력과 합세, 양주의 해령(蟹嶺 : 속칭 게너미 고개)에서 왜적을 요격하여 적 70여급을 참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1592년(선조 25) 6월 12일 관북방면으로 진격중인 왜장 가도(加藤) 및 모리(毛利)의 공격에 밀려 방어하던 철영(鐵嶺)을 버리고 갑산(申山)으로 퇴각하다가 기춘연(奇春年), 박연문(朴延文) 등 부적난민(附敵亂民)들의 기습을 받고 싸우다가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후사가 끊겼다.
 1900년(광무 4) 특명으로 장양도정 주(?) 손자 현감 양(楊)의 9대손 회덕(會悳)에게 봉사케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 선산 자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