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항수(恒壽) 1725∼178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겸오(兼五), 은천군의 9대손 덕일(德一)의 아들이다.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가 되었다.
 묘소는 일동면 계동 장자산 자좌이다. 배위는 고흥류씨로 용(溶)의 딸과 숙부인 동래정씨로 주석(周錫)의 딸이다. 슬하에 효훈(孝勳) 1남을 두었다.

해구(海龜) 1678∼1748    파명:경녕군(敬寧君)
  복성군의 8대손 득길(得吉)의 아들이다. 행 절충장군을 하였다.
 묘소는 대장면 부사치 후원 묘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행주은씨로 문형 이창(以昌)의 딸이다. 슬하에 동엽(東燁) · 동욱(東旭) · 동혁(東赫) · 동원(東元) 4남을 두었다.

혁(爀) 1588(선조 21)∼164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명보(明甫), 단산도정의 현손 문욱(文郁)의 계자이다.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및 동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홍북면 산소동 유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동래정씨로 수사 문룡(文龍)의 딸이다. 슬하에 극배(克培) · 원배(元培) · 덕배(德培) · 천배(天培) · 득배(得培) · 의배(義培) · 선배(善培) · 수배(壽培) 6남을 두었다.

현기(玄紀) 1637∼170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원방(元方), 호는 졸재(拙齋). 수광의 증손으로 동규의 아들이다.
 1673년(현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76년(숙종 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사관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수찬이 되었다. 학식이 깊어 나라의 중요한 공문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작성되었다. 1686년(숙종 12) 또다시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의가 되고, 이어서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1688년(숙종 14) 외직인 전라도 관찰사로 나아가고, 이어서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남인(南人)인 그는 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1699년(숙종 25)에 풀려났다.

현석(玄錫) 1647∼1703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하서(夏瑞), 호는 유재(游齋). 수광의 증손으로 당규(堂揆)의 아들이다.
 1667년(현종 8) 진사가 되고, 1675년(숙종 1)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에 보직된 뒤 삼사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682년(숙종 14) 우승지가 되었으나, 송시열 등 서인(西人)의 예론(禮論)을 반대하다가 철원에 부처(付處)되었다. 1688년(숙종 14) 다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 1691년(숙종 17) 동지중추부사, 1693년(숙종 19) 춘천부사를 지냈다. 이듬해 청풍현감을 자원하여 나가 <명사강목(明史綱目)>을 저술하였으며, 그 뒤 한성부 부윤 · 우참찬 ·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관한 여러 소장과 저서를 제진(製進)하였다. 탕평책과 중농정책을 건의하였으며, 경연강의 교재의 개편을 진언하였다. 국방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강화도 축성방안과 봉수제도(烽燧制度)의 개선방안 등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춘천부사 등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진휼(賑恤)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경제세무(經濟稅務)에 관한 실용적인 사상을 가지고 조세의 감면 등 각종 정책을 입안하였고, 역리(易理)로써 군도(君道)와 치술을 설명한 <역의규반(易義窺斑)>을 저술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론보다는 존심양성 등 실천적인 덕목에 치중하였다. 저서로는 <명사강목> 24권, <역의규반> 1권, <유재집(游齋集)> 24권 등이 있다.

현욱(顯郁) 1560∼ ?    파명:경녕군(敬寧君)
  단산도정의 증손 침의 아들이다. 증 통훈대부 행 의금부사에 올랐다.
 묘소는 월봉 담면 내이리 덕고개에 있다. 배위는 숙인 밀양박씨이다. 계자에 득례(得禮)가 있다.

현조(玄祚) 1654∼1710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계상(啓商), 호는 경연당(景淵堂). 좌랑 석규(碩揆)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로 좌랑 성복(聖復)의 딸이다.
 큰아버지 동규(同揆)에게 수학하였다. 1681년(숙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 다음 해 검열을 거쳐 대교에 올랐다. 1684년(숙종 10) 구언(求言)에 따라 허목의 관작복구를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대교로 복직, 1689년(숙종 15) 사가독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가 성균관 전적으로 부임한 다음 경상도도사·경기도도사를 거쳐 사간원 정언 · 홍문관 수찬 · 이조좌랑을 지냈다. 1689년 인현왕후의 폐출을 적극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사인 · 사간 · 대사간 ·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감사를 지냈다. 저서로 <경연당집(景淵堂集)>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안동김씨로 승지 구만(龜萬)의 딸이다. 계자는 한보(漢輔)이다.
 묘소는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 회곡 자좌이다.

형광(亨光) 1547∼159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충서(忠恕), 모양군의 증손 희득의 아들이다. 벼슬은 부사과에 이르렀다.
 묘소는 황해도 금천군 기산면 불모동 간좌이다. 배위는 의인 기흥이씨로 장사랑 수(遂)의 딸이다. 슬하에 성근(成根) · 후근(厚根) · 심근(深根) · 삼근(參根) · 영근(榮根) 5남을 두었다.

형욱(馨郁) 1551∼1630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덕무(德懋), 호는 난고(蘭皐). 홍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4년(선조 27)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이조정랑 · 홍문관 부수찬 · 문학 · 시독관 등을 역임하고 1597년(선조 30)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600년(선조 33) 사간에 이어 함경도 병량어사 · 보덕을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다. 1603년(선조 36)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고, 1605년(선조 38) 대사간, 이듬해 좌부승지에 이어 우부승지가 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강원도 관찰사, 1612년(광해군 4) 전주부윤이 되었으며, 1615년(광해군 7)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1618년(광해군 10) 행 돈녕도정을 역임하였다.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홍(洪) 1526∼1572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거원(巨源), 익흥군의 계자이다. 행 부사과,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함봉산하 손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안동권씨로 사경 습(習)의 딸이다. 슬하에 경욱(慶郁) · 광욱(光郁) · 형욱(馨郁) · 영욱(榮郁) 4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