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창인(昌仁) 1480∼ ?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5대 종손이며 유성군의 손자이고 증 가선 진주목사 승원(承元)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주한씨 좌의정 서성부원군 치인(致仁)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파평윤씨 판중추 파천군 양로(陽老)의 딸이다.
1505년(연산군 11) 벼슬길에 서용되어 종5품 창신교위로 충좌위 부사직에 올랐고 1506년(중종 1)에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정3품 당상인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 팔야동산81번지 선산하 자좌이다.
1505년(연산군 11) 벼슬길에 서용되어 종5품 창신교위로 충좌위 부사직에 올랐고 1506년(중종 1)에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정3품 당상인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 팔야동산81번지 선산하 자좌이다.
척(滌) 1572~163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급지(汲之), 호는 만호(晩湖) · 영호정(映湖亭), 초휘는 설(渫). 대군의 7대손이며 여양군 아들 전성군의 증손으로 증 호조참판 규빈(奎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선산임씨로 장령 혼(渾)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청주한씨로 현감 침(琛)의 딸이다.
별천으로 무과에 올라 훈련도정이 되었으며 보성 · 정평 등지의 수령을 지낸 다음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죽산부사가 되었다. 이 때 인조대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에 이르자 인조대왕이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금장식이 달린 허리띠와 옥피리 및 보검을 하사하였다. 화의를 강경히 반대하는 소(疏)를 올리고 공조참판에 승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상원(尙元)도 집안 장정들을 이끌고 의병을 모아 청주에 이르렀으나 화의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고 돌아갔다. 뒤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절의록(節義錄)>에 기록하여 그의 충성심을 기렸다. 그는 문사필법(文詞筆法)이 뛰어났으며 <근역서화집(槿域書畵集)>에 실려 있다.
묘소는 고양군 신도면 화전에 초장하였다가 1941년 전남 영광군 대마면 송촌리 가작동 선영하 유좌에 이장했다. 손자 주한(柱漢)이 쓰고 현손 중호(重虎)가 지은 행장이 있다.
별천으로 무과에 올라 훈련도정이 되었으며 보성 · 정평 등지의 수령을 지낸 다음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죽산부사가 되었다. 이 때 인조대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에 이르자 인조대왕이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금장식이 달린 허리띠와 옥피리 및 보검을 하사하였다. 화의를 강경히 반대하는 소(疏)를 올리고 공조참판에 승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상원(尙元)도 집안 장정들을 이끌고 의병을 모아 청주에 이르렀으나 화의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고 돌아갔다. 뒤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절의록(節義錄)>에 기록하여 그의 충성심을 기렸다. 그는 문사필법(文詞筆法)이 뛰어났으며 <근역서화집(槿域書畵集)>에 실려 있다.
묘소는 고양군 신도면 화전에 초장하였다가 1941년 전남 영광군 대마면 송촌리 가작동 선영하 유좌에 이장했다. 손자 주한(柱漢)이 쓰고 현손 중호(重虎)가 지은 행장이 있다.
철구(鐵求) 1787∼183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빈경(?卿), 호는 규원(葵園). 대군의 15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1대손으로 증 좌찬성 득제(得濟)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 동복오씨로 대복(大復)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로 주부 행운(行運)의 딸이다.
1806년(순조 6) 별천으로 입시하여 사복시 내승에 특제됐으며 궐내의 시사에서 입격했다. 다음 해 식년 전시에 급제하여 참상인 무 겸 별군직인 선전관 도총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1808년(순조 8) 궁중 시사에서 우등하여 당상인 절충에 오르고 우림장 위원군수가 되고 1810년(순조 10)에는 내승 파주목사를 거쳐 2년 뒤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1814년(순조 14)에 행 수석선전관에 이어 1819년(순조 19) 정주목사, 1822년(순조 22) 회령부사를 거친 후 교동수사 때 가선으로 승자됐다. 1824년(순조 24) 금위영 중군 북병사가 되고 1826년(순조 26)에는 5위도총부 부총관 · 훈련원 도정 · 포도대장이 됐다. 다음 해 영변부사를 거친 후 평안병사에 옮겼고, 1830년(순조 30) 양주목사를 지냈다. 그 후 금군별장 · 승정원 좌승지를 거친 다음 금위대장이 되고 1833년(순조 33) 형조참판에 이어 동지의금부사와 한성판윤이 됐다. 1835년(헌종 1) 훈련원 겸 도정이 되고 다음 해 지훈련원사로 있다가 별세했다. 영의정에 증직되고 완흥군에 봉군됐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축좌이다.
1806년(순조 6) 별천으로 입시하여 사복시 내승에 특제됐으며 궐내의 시사에서 입격했다. 다음 해 식년 전시에 급제하여 참상인 무 겸 별군직인 선전관 도총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1808년(순조 8) 궁중 시사에서 우등하여 당상인 절충에 오르고 우림장 위원군수가 되고 1810년(순조 10)에는 내승 파주목사를 거쳐 2년 뒤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1814년(순조 14)에 행 수석선전관에 이어 1819년(순조 19) 정주목사, 1822년(순조 22) 회령부사를 거친 후 교동수사 때 가선으로 승자됐다. 1824년(순조 24) 금위영 중군 북병사가 되고 1826년(순조 26)에는 5위도총부 부총관 · 훈련원 도정 · 포도대장이 됐다. 다음 해 영변부사를 거친 후 평안병사에 옮겼고, 1830년(순조 30) 양주목사를 지냈다. 그 후 금군별장 · 승정원 좌승지를 거친 다음 금위대장이 되고 1833년(순조 33) 형조참판에 이어 동지의금부사와 한성판윤이 됐다. 1835년(헌종 1) 훈련원 겸 도정이 되고 다음 해 지훈련원사로 있다가 별세했다. 영의정에 증직되고 완흥군에 봉군됐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축좌이다.
최환(?煥) 1775∼181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번(士蕃), 호는 근사재(近思齋), 대군의 12대손이며 춘성정의 9대손으로 한탄 역(쫃)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산송씨이다. 백부 제(梯)에게 입계되었으며 배위는 숙부인 남원윤씨로 치중(致中)의 딸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행이 뛰어나 1858년(철종 9)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그가 남긴 문집 <근사재유고>는 2권 1책으로 권1에 시 21수, 서(書) 3편, 기 · 서(序) 각 1편, 묘지 4편, 잡저 4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2에는 부록으로 행장 · 묘갈명 · 지은록(志恩錄) · 유장(儒狀)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37년 증손인 정우(컪宇)가 편집 간행하고 권두에 이유승(李裕承)의 서문과 권말에 편집자 정우의 발문이 있다. 유고 가운데 시는 학문적 내용을 주제로 한 증자왕유 · 독중용유음(讀中庸有吟) 등과 이국(?菊) · 원송(園松) · 춘일(春日) 등의 서정시, 월선정(月先亭) 등 자연경관을 소재로 한 것 등 다양하다. 서(書) 가운데 허진(許璡)에게 답한 글은 심성설(心性說)에 대한 성현들의 주장을 예시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장편의 글과 동생 삼환(三煥) · 명환(明煥) 등에게 학문 요령을 설파한 편지가 있다. 잡저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은 인심과 도심이 모두 이기(理氣)의 초심(初心)에서 유출되어 지각의 운동에 따라 온갖 사물에 응하게 되는 진리를 제시하여 인심 · 도심의 명목은 다르나 실은 두 가지의 마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죽방동 선산 청룡내록 병좌이다. 문판서 이유승이 지은 묘갈명이 있다. <근사재 유고>(2권 1책)는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 · 성균관대 ·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행이 뛰어나 1858년(철종 9)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그가 남긴 문집 <근사재유고>는 2권 1책으로 권1에 시 21수, 서(書) 3편, 기 · 서(序) 각 1편, 묘지 4편, 잡저 4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2에는 부록으로 행장 · 묘갈명 · 지은록(志恩錄) · 유장(儒狀)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37년 증손인 정우(컪宇)가 편집 간행하고 권두에 이유승(李裕承)의 서문과 권말에 편집자 정우의 발문이 있다. 유고 가운데 시는 학문적 내용을 주제로 한 증자왕유 · 독중용유음(讀中庸有吟) 등과 이국(?菊) · 원송(園松) · 춘일(春日) 등의 서정시, 월선정(月先亭) 등 자연경관을 소재로 한 것 등 다양하다. 서(書) 가운데 허진(許璡)에게 답한 글은 심성설(心性說)에 대한 성현들의 주장을 예시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장편의 글과 동생 삼환(三煥) · 명환(明煥) 등에게 학문 요령을 설파한 편지가 있다. 잡저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은 인심과 도심이 모두 이기(理氣)의 초심(初心)에서 유출되어 지각의 운동에 따라 온갖 사물에 응하게 되는 진리를 제시하여 인심 · 도심의 명목은 다르나 실은 두 가지의 마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죽방동 선산 청룡내록 병좌이다. 문판서 이유승이 지은 묘갈명이 있다. <근사재 유고>(2권 1책)는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 · 성균관대 ·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충(沖) 1539∼161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거용(巨容), 호는 칠택(七澤), 대군의 7대손으로 증 영의정 정빈(廷賓)의 아들이다.
1600년(선조 3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무장현감을 시작으로 선전관 · 성천부사 · 수원부사 · 형조정랑 · 통례원 상례 · 정언 · 지평 · 장령(掌令) · 전라감사 등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대사간에 올랐을 때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615년(광해군 7) 4월에 전날의 현저한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는 전교(傳敎)와 함께 선수부제조(膳修副提調)로 제수되고, 이어 병조참판 · 판윤으로 제수되면서 반숙마(半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1616년(광해군 8) 정월에 판윤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고, 같은 해 4월에 전교를 내리기를 “리충이 국사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인데 졸지에 중병을 얻어 내 염려되는 지라 그의 아우 명(溟)이 죄적(罪籍)에 있으니 이를 사하여 형인 충의 병을 돌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3월 5일 별세하였다. 조정에서는 관곽과 부의를 내리고 특별히 입관하기 전에 좌찬성을 제수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에 있다.
1600년(선조 3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무장현감을 시작으로 선전관 · 성천부사 · 수원부사 · 형조정랑 · 통례원 상례 · 정언 · 지평 · 장령(掌令) · 전라감사 등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대사간에 올랐을 때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615년(광해군 7) 4월에 전날의 현저한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는 전교(傳敎)와 함께 선수부제조(膳修副提調)로 제수되고, 이어 병조참판 · 판윤으로 제수되면서 반숙마(半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1616년(광해군 8) 정월에 판윤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고, 같은 해 4월에 전교를 내리기를 “리충이 국사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인데 졸지에 중병을 얻어 내 염려되는 지라 그의 아우 명(溟)이 죄적(罪籍)에 있으니 이를 사하여 형인 충의 병을 돌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3월 5일 별세하였다. 조정에서는 관곽과 부의를 내리고 특별히 입관하기 전에 좌찬성을 제수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에 있다.
충양(忠養) 156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효숙(孝叔), 호는 후계(後溪), 대군의 8대손으로 죽산군수 한(澣)의 아들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 병과에 급제, 시강원 문학이 되고 춘추관 기주관(記注官) · 직강(直講) · 사간원 정언 · 함경도사 · 어모장군 행 충좌위부호군 · 필선(弼善) · 대사간 · 통례원 좌통례 ·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선조 32)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잠시 자리를 비운 일이 있었는데 대사간 민몽룡(閔夢龍)이 체직하라는 계를 올려 체직되기도 했다. 1603년(선조 36) 장령으로 있을 때 내의로서 약재를 정결히 다루지 않은 일과 병을 치료함에 있어 공경과 삼가함이 소홀하여 주무관을 처벌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선산에 있다.
1596년(선조 29) 정시 병과에 급제, 시강원 문학이 되고 춘추관 기주관(記注官) · 직강(直講) · 사간원 정언 · 함경도사 · 어모장군 행 충좌위부호군 · 필선(弼善) · 대사간 · 통례원 좌통례 ·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선조 32)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잠시 자리를 비운 일이 있었는데 대사간 민몽룡(閔夢龍)이 체직하라는 계를 올려 체직되기도 했다. 1603년(선조 36) 장령으로 있을 때 내의로서 약재를 정결히 다루지 않은 일과 병을 치료함에 있어 공경과 삼가함이 소홀하여 주무관을 처벌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선산에 있다.
태석(台奭) 1697∼178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창보(昌輔), 대군의 11대손이며 강성도정의 8대손이고 증 호조참판 서화(瑞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동래정씨로 광홍(廣弘)의 딸이다. 부인은 증 정부인 문화류씨로 치상(致相)의 딸이다.
유학직부(幼學直赴)로 1771년(영조 47) 식년전시에 75세의 고령으로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기로과(耆老科) 은사인(恩賜人)으로 선발되어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되었으며 그 후 예조참판에 승자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선산하 오좌이다.
유학직부(幼學直赴)로 1771년(영조 47) 식년전시에 75세의 고령으로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기로과(耆老科) 은사인(恩賜人)으로 선발되어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되었으며 그 후 예조참판에 승자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선산하 오좌이다.
태수(泰壽) 1658∼172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형(士亨), 호는 지곡(止谷), 대군의 10대손이며 장제부정의 7대손이고 증 좌찬성 원구(元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성주이씨로 참판 준구(俊耉)의 딸이다. 배위는 청송심씨로 진사 약기(若沂)의 딸과 창녕조씨 준경(雋卿)의 딸이다.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와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인으로 1679년(숙종 5) 진사시에 합격한 다음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1698년(숙종 24)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 1702년(숙종 28)에는 성현도(省峴道) 찰방, 1706년(숙종 32)에 내시교관, 1707년(숙종 33)에는 왕자사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에는 세자시강원 자의로 천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그 후에도 1719년(숙종 45)에는 사재감 직장으로, 1721년(경종 1)에는 빙고 별제에 이어 세자익위사 익찬에서 사어로, 1723년(경종 3)에는 종부시 주부에 제배(除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직 학문 탐구와 국가 및 후진을 위한 집필에 생애를 바쳤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에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정신에 입각하여 존명양이(尊明攘夷)의 사적을 간추려 놓은 <존주록(尊周錄)> 9권 5책이 있는데 이는 1716년(숙종 42) 그의 문인 이수이(李壽?)가 편술한 것이며, 부(賦) · 시 · 서 등이 포함된 <지곡선생문집>이 5권, <사례정의>와 경기 · 황해 · 전라 및 함경도의 관방론(關防論) 등이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동상면 화암 자좌이다. 유고로는 <존주록> 9권 5책(규장각 · 장서각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지곡선생유고> 6책(규장각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관방론>은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에 수록, <사례정의>는 <현석집 · 명재집> 및 <예의유집> 등에 수록되어 있다.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와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인으로 1679년(숙종 5) 진사시에 합격한 다음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1698년(숙종 24)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 1702년(숙종 28)에는 성현도(省峴道) 찰방, 1706년(숙종 32)에 내시교관, 1707년(숙종 33)에는 왕자사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에는 세자시강원 자의로 천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그 후에도 1719년(숙종 45)에는 사재감 직장으로, 1721년(경종 1)에는 빙고 별제에 이어 세자익위사 익찬에서 사어로, 1723년(경종 3)에는 종부시 주부에 제배(除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직 학문 탐구와 국가 및 후진을 위한 집필에 생애를 바쳤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에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정신에 입각하여 존명양이(尊明攘夷)의 사적을 간추려 놓은 <존주록(尊周錄)> 9권 5책이 있는데 이는 1716년(숙종 42) 그의 문인 이수이(李壽?)가 편술한 것이며, 부(賦) · 시 · 서 등이 포함된 <지곡선생문집>이 5권, <사례정의>와 경기 · 황해 · 전라 및 함경도의 관방론(關防論) 등이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동상면 화암 자좌이다. 유고로는 <존주록> 9권 5책(규장각 · 장서각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지곡선생유고> 6책(규장각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관방론>은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에 수록, <사례정의>는 <현석집 · 명재집> 및 <예의유집> 등에 수록되어 있다.
태정(台鼎) 1705∼177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응(士凝), 대군의 11대손이며 강성도정의 8대손이고 증 이조참판 서항(瑞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의령남씨로 통제사 오성(五星)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 그리고 문화류씨 한장(漢章)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하고, 1759년(영조 35) 식년 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급제자 54명을 인솔, 빈양문에서 친림한 영조대왕을 배알하였다. 1762년(영조 38) 지평, 다음 해 정언을 거쳐 1764년(영조 40)에는 다시 지평이 되었으며 1767년(영조 43)에는 장령이 되었다. 그 후 1771년(영조 47) 집의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집의가 된 후 1773년(영조 49) 69세가 되어 당상인 승지로 승자됐다.
묘소는 장단 만종음 선산 옆 유좌이다.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하고, 1759년(영조 35) 식년 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급제자 54명을 인솔, 빈양문에서 친림한 영조대왕을 배알하였다. 1762년(영조 38) 지평, 다음 해 정언을 거쳐 1764년(영조 40)에는 다시 지평이 되었으며 1767년(영조 43)에는 장령이 되었다. 그 후 1771년(영조 47) 집의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집의가 된 후 1773년(영조 49) 69세가 되어 당상인 승지로 승자됐다.
묘소는 장단 만종음 선산 옆 유좌이다.
필달(必達) 1588∼1651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민(子敏), 대군의 7대손으로 지평 중계(重繼)의 아들이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고 다음 해 정월에 서궁을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그 일이 후회가 되어 고향에 내려가 나오지 않았다. 1621년(광해군 13) 사헌부에서 파직하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려져 체직되었다. 인조반정 후 사관이 되고 1627년(인조 5) 3월 소모장(召募將)으로 의병을 모아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지방 수령으로 제수되었다. 1638년(인조 16) 밀양부사로 있으면서 군병을 가리어 군력을 기르고 포 · 화살 등 무기를 많이 비축한 공로가 위에 알려져 상으로 말 한 필을 하사받았다.
묘소는 광주 문현산에 있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고 다음 해 정월에 서궁을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그 일이 후회가 되어 고향에 내려가 나오지 않았다. 1621년(광해군 13) 사헌부에서 파직하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려져 체직되었다. 인조반정 후 사관이 되고 1627년(인조 5) 3월 소모장(召募將)으로 의병을 모아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지방 수령으로 제수되었다. 1638년(인조 16) 밀양부사로 있으면서 군병을 가리어 군력을 기르고 포 · 화살 등 무기를 많이 비축한 공로가 위에 알려져 상으로 말 한 필을 하사받았다.
묘소는 광주 문현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