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후성(後晟) 1641∼1703 파명:덕천군(德泉君)
  완성군(莞城君)의 차남 상산군의 7대손이며 응(凝)의 현손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포도대장을 지냈다.
배위는 개성고씨 유원(由遠)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복촌 건좌에 있다.
배위는 개성고씨 유원(由遠)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복촌 건좌에 있다.
휘진(彙晋) 1677∼1748 파명:덕천군(德泉君)
 휘진(彙晋) [1677(숙종 3)∼1748(영조 24)]
자는 내경(來慶), 삼산수의 6대손이고 순화부수의 5대손이다.
헌(櫶)의 아들로 1702년(숙종 28) 생원시에 3등으로 급제하고, 1725년(영조 1)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 사헌부 장령(掌令)·함안군수를 지내고 이인좌 난의 평정공신이 되었다.
배위는 부사(府使) 칠원윤씨 시진(時進)의 딸이다.
묘소는 시흥 노은사에 있다.
자는 내경(來慶), 삼산수의 6대손이고 순화부수의 5대손이다.
헌(櫶)의 아들로 1702년(숙종 28) 생원시에 3등으로 급제하고, 1725년(영조 1)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 사헌부 장령(掌令)·함안군수를 지내고 이인좌 난의 평정공신이 되었다.
배위는 부사(府使) 칠원윤씨 시진(時進)의 딸이다.
묘소는 시흥 노은사에 있다.
흥종(興宗) [? ∼1592 파명:덕천군(德泉君)
 흥종(興宗) [? ∼1592(선조 25)]
송림군의 현손이며 부사과(副司果) 이(苡)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 5백인을 모집하여 충북 보은지방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조헌(趙憲)과 연락하여 청주에서 왜군을 대파한 공로로 대구부사(大邱府使)가 되었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청주한씨 참덕(參德)의 딸이다.
묘소는 청주 서면 안심(安心) 묘좌이다.
송림군의 현손이며 부사과(副司果) 이(苡)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 5백인을 모집하여 충북 보은지방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조헌(趙憲)과 연락하여 청주에서 왜군을 대파한 공로로 대구부사(大邱府使)가 되었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청주한씨 참덕(參德)의 딸이다.
묘소는 청주 서면 안심(安心) 묘좌이다.
희룡(希龍) 1544∼1597 파명:덕천군(德泉君)
 희룡(希龍) [1544(중종 39)∼1597(선조 30)]
운수군의 증손이며 화암부수의 아들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내고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효행이 독실하고 동기간의 우애가 깊었다. 일찍이 매부 최영경(崔永慶 : 1529∼159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400명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워 자주 크게 이겼는데, 1597년 9월 14일 청주 비홍(飛鴻)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사후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시체를 못찾아 옷과 신발로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주북리 신릉동 정좌에 장례지냈다.
배위는 영천이씨 도사(都事) 충언(忠彦)의 딸이다.
운수군의 증손이며 화암부수의 아들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내고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효행이 독실하고 동기간의 우애가 깊었다. 일찍이 매부 최영경(崔永慶 : 1529∼159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400명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워 자주 크게 이겼는데, 1597년 9월 14일 청주 비홍(飛鴻)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사후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시체를 못찾아 옷과 신발로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주북리 신릉동 정좌에 장례지냈다.
배위는 영천이씨 도사(都事) 충언(忠彦)의 딸이다.
희평(希枰) 1536∼1630 파명:덕천군(德泉君)
 희평(希枰) [1536(중종 31)∼1630(인조 8)]
운수군의 증손이며 강릉부수의 장남이다.
천성이 원래 청렴하고 감식력(鑑識力)이 탁이(卓異)하여 사화(士禍)가 일어날 줄 알아 중종·명종 때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가족을 데리고 열수(列水 : 혹은 列樹, 康津의 地名)로 가 산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품계는 정덕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숙부인 신창맹씨로 감역(監役) 보우(輔佑)의 딸이다.
묘소는 전남 보성군 율어면 내대리 병좌이다.
운수군의 증손이며 강릉부수의 장남이다.
천성이 원래 청렴하고 감식력(鑑識力)이 탁이(卓異)하여 사화(士禍)가 일어날 줄 알아 중종·명종 때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가족을 데리고 열수(列水 : 혹은 列樹, 康津의 地名)로 가 산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품계는 정덕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숙부인 신창맹씨로 감역(監役) 보우(輔佑)의 딸이다.
묘소는 전남 보성군 율어면 내대리 병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