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중복(重馥) 1719∼179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국화(國華), 대군의 12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8대손으로 증 예조참판 구령(耉齡)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고령신씨로 감찰 태징(泰澄)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여흥민씨로 병사 창기(昌基)의 딸이다.
 생원이 되어 1771년(영조 4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73년(영조 49) 지평을 거쳐 다음 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1775년(영조 51) 헌납이 되었다가 1783년(정조 7) 혜빈(惠嬪)에게 가상존호(加上尊號) 옥책문(玉冊文)을 올리는 행사 때 통례원 좌통례로 참가하여 가자되었으며 1786년(정조 10) 여주목사 재직시 영릉에 보토(補土)하는 역사에 참여하여 가자, 참판에 승진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묘좌에 있다.
중인(重寅) 1686∼173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원(士元), 대군의 12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석령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창원황씨로 첨정 응로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평산신씨로 감역(監役) 착(錯)의 딸이다.
 진사 후 참봉으로 1730년(영조 6) 정시 문과 병과에 합격하여 한림 · 삼사이랑(三司吏郞)을 거쳐 승지에 오르고 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예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에 증직됐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홍농읍 덕산 임좌에 있다.
중호(仲虎) 1512∼155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풍후(風后), 호는 이소재(履素齋), 시호는 문경(文敬). 대군의 현손이며 정의대부 고안군 정(精)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성주이씨 영의정 성산부원군 문경공 직(稷)의 손녀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청주한씨로 이조정랑 세공(世恭)의 딸이다.
 서봉(西峰) 류우(柳藕)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김안국(金安國)의 절찬을 받았으며 기묘사화가 있은 후에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는데 이를 본 서경덕이 칭찬하기를 “나로서는 가히 미치지 못하겠다.” 하였으며, 퇴계 이황도 “공의 도학이 너무나 정미(精微)해서 경솔히 의론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1545년(인종 1) 국상이 나자 문도를 이끌고 궐문 밖에서 망곡(望哭)을 하고 돌아와 나오지 아니하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더불어 법도를 함께 하였으며, 동몽훈도(童蒙訓導)를 거쳐 1554년(명종 9) 사과(司果)가 되었다.
 벼슬보다는 학문 연구와 강학에 더욱 힘썼다. 유고 <심성정도(心性情圖)>에서 심(心) · 이(理) · 도(道) 등의 관계를 `성(性)은 심의 이 이고, 심은 성의 영(靈)이며, 기(氣)는 이의 구(具)이고, 인(人)은 천(天)의 심(心)이다\' 라고 설명하였고, `도(道)는 이의 간(幹)이고, 이는 도의 조(條)\'라고 하였다. 명종과 선조조에 걸쳐 배출된 문하에 리성중(李誠中) · 윤두수(尹斗壽) · 리양원(李陽元) · 리홍주(李弘胄) · 정지연(鄭芝衍) · 서기(徐起) · 김근공(金勤恭) · 박응남(朴應男) · 박응복(朴應福) 등 400여 명에 이르고 평생을 구용(九容) · 구사(九思) 및 경(敬) · 의(義)로써 몸과 마음가짐의 규칙을 삼았다. 44세에 별세하였으며 사후 366년 되는 1910년(순종 4) 정통 유현 도학자로 절행이 뛰어난 유학종사로 추앙되어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고 `문경\'이란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 효자봉 해좌이다. 문인 김근공과 정지연이 지은 묘갈명이 있다. 유저로는 <심성정도(心性精圖)> · <성리명감(性理明鑑)> · <자경시문(自警詩文)> 20여 권 및 <이소재집(履素齋集)>이 있다.
증우(曾宇) 1837∼191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양원(養元), 대군의 15대손이며 파성군의 12대손으로 승지 회승(會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풍양조씨 군수 덕양(德襄)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의령남씨 병사 이완(履完)의 딸이다.
 1858년(철종 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등 내 · 외직을 두루 역임한 다음 수사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동평리 묘좌에 있다.
지익(志益) 1823∼186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선우(善友), 대군의 17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3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종우(鐘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진주류씨로 학순(學淳)의 딸이다. 정순(晶純)에게 입후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전의이씨로 병사 희보(熙輔)의 딸과 숙부인 여흥민씨로 태오(泰吾)의 딸이다.
 1843년(헌종 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845년(헌종 11) 통훈으로 승계되어 장연현감이 되었으며 1848년(헌종 14) 오위장이 되었다. 1850년(철종 1) 통정에 올라 행 풍천부사를 지낸 다음 승지가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선산하에 있다.
지항(之恒) 1605∼165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월여(月如), 장제부정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증 영의정 목(?)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장수황씨로 현감 우(佑)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평산신씨로 유수 감(鑑)의 딸이다.
 둔암(芚菴) 송연(宋淵) ·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의 문인으로 1627년(인조 5)에 사마시에 입격, 생원이 되고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37년(인조 15) 봉교(奉敎)로 올라 주서 · 성균관 전적 겸 비변사 낭청 · 병조좌랑 겸 순찰사 · 종사관을 거쳐 홍산현감으로 나갔다. 1643년(인조 21) 성균관 직강이 되고 교리 · 수찬 · 헌납을 역임한 다음 이듬해에 부교리와 교리로 재직하면서 당상인 통정으로 승계되고 병조참지로 옮겼다. 1645년 승정원 우부승지와 우승지를 거친 다음 군직인 호군으로 있다가 1646년 6월 배천군수로 옮기고 예조참의가 된 후 다시 승문원 제조가 되었다. 1649년 사간원 대사간 · 호군 · 형조참의를 거쳐 1650년(효종 1) 공조참의 · 성균관 대사성 · 대사간을 역임한 후 1651년(효종 2) 6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으며, 손자 익수(益壽)로 인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복좌리 보개산에 있다.
직언(直彦) 1545∼162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 [(인조 6)]
 초명은 시언(時彦), 자는 군미(君美), 호는 추천(秋泉) 또는 졸암(拙庵), 시호는 정간(貞簡). 대군의 5대손이며 칠산군 선손(璿孫)의 손자이고 증 좌찬성 형(泂)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동래정씨로 별좌 응운(應雲)의 딸이며, 부인은 정경부인 단양우씨로 진사 사겸(思謙)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를 거쳐 1576년(선조 9)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典籍) · 호조좌랑 · 정랑 · 지평 · 사성(司成)을 역임하고 평산군수로 나갔다가 1589년 사직했다. 그 후 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 태복시정(太僕寺正)을 지내고 강릉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 뒤 장령 · 사재감정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통어사(統禦使)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사예(司藝)에 보직되고 이어 헌납 · 장령 등을 역임한 뒤 명나라에 가서 군량미의 원조를 청했다. 이듬해 사간으로 경상도 진휼어사(賑恤御史)가 되어 백성을 선유(宣諭)하고 돌아와 <시사8조(時事八條)>를 상소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이 때 정철(鄭澈)의 죄를 추론(追論)하는 의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여 파직되었다. 1596년 해주목사에 기용되고 이어 인천 · 수원 등지의 수령을 거친 다음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01년 승지에 올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뒤에 여주목사 · 경주부윤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아 경기도 관찰사와 1605년(선조 38)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대사헌이 되었으나 이 해 임해군(臨海君)의 옥사로 사직했다. 1612년(광해군 4) 개성부 유수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듬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은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우참찬에 기용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우찬성으로 임금을 강화에 호종(扈從), 척화를 주장했다.
 묘소는 시흥군 금불암 칠산군묘 청룡 해좌였는데 서울시 확장 당시 후손과의 연락 두절로 실전되었다. 유고로는 <추천선생집(秋泉先生集)> 1권(규장각 소장)이 남아 있다.
진수(震壽) 1648~171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춘장(春長), 대군의 10대손이며 장제부정의 7대손이고 증 좌찬성 원구(元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성주이씨로 참판 준구(俊耉)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 고령박씨로 이조판서 문효공(文孝公) 장원(長遠)의 딸이다.
 진사로 감역을 지내다가 1693년(숙종 19)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96년(숙종 22) 부수찬에 이어 문학 · 지평 · 수찬 · 정언을 역임하고 1698년(숙종 24) 교리에 오르고 헌납 · 사간 · 집의 · 필선 · 보덕을 거쳐 1702년(숙종 28) 승지가 되었다. 그 후 대사간이 되었다가 1709년(숙종 35) 4월 전라도 관찰사에 기용되고 2년 후 내직인 승지로 다시 복귀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형조참의가 되고 유수를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암 유좌에 있다.
집(楫) 1503∼158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여제(汝濟). 대군의 5대손이며 여양군의 손자이고 증 의정부 영의정 전성군 대(팾)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동래정씨 내자시정 종보(宗輔)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하동정씨로 별좌 승효(承孝)의 딸이다.
 생원 때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편집한 <동유사우록(東儒士友錄)>을 조정에서 간행할 것을 상소하여 승정원에서 간행하라는 하비(下批)를 받았으며 생원재랑 · 평시직장 · 의금부도사, 장연 · 연일 · 재령군수를 역임하였다. 1560년(명종 15) 5월 재령군수 재임시의 치적으로 가자되어 대사간에 오르고, 1563년(명종 18) 6월에는 남양부사를 거쳐 다음 해 2월 장예원 판결사가 되고 1580년(선조 13)에는 돈녕부 도정에 이어 전주부윤 겸 전주진관병마절제사를 역임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 유좌이다. 신도비는 전 성균관 부관장 고부이씨 수원(壽源)이 글을 짓고 글씨는 성균관 전학 김진해(金振海)가 썼으며 증조부 율원군 사당 삼문밖 좌편에 있다.
찬의(燦儀) 1860∼1911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문현(文現), 호는 월송(月松). 대군의 16대손이며 평고도정(平皐都正)의 13대손으로 음(蔭) 동지돈녕(同知敦寧) 경우(璟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해주오씨로 준상(駿常)의 딸이며, 배위는 숙부인 고흥류씨이다.
 1894년(고종 3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시독(侍讀) 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낸 다음 참상(參上)으로 올라 의관(議官)이 되고 정릉(貞陵) · 홍릉(洪陵) 행행(幸行) 때 배종한 공으로 통정(通政)으로 가자됨과 아울러 말 한 필을 하사받았으며 비서원(秘書院) 승(丞)이 되었다.
 묘소는 전북 임실군 청웅면 두복리 대장골 곤좌이다. 비서승 안동김씨 영한(寗漢)이 짓고 해평윤씨 용구(用求)가 쓴 묘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