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정빈(廷賓) 1539∼159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관(景觀), 대군의 6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손자로 증 좌찬성 이조판서 양(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함안윤씨로 첨정 지청(之淸)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청주한씨로 감찰 수(洙)의 딸이다.
1563년(명종 18) 유학으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로 장원급제했으며 병조좌랑 정언을 거쳐 급제 4개월만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아버지가 이조판서가 되자 상피법(相避法)에 따라 정언으로 전직되었다. 이 때 후임으로 친구인 류영길(柳永吉)을 추천하여 대간의 심한 반발을 받았으며 그 뒤 관직이 삭탈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평에서 적에게 화를 입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 곤좌이다.
1563년(명종 18) 유학으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로 장원급제했으며 병조좌랑 정언을 거쳐 급제 4개월만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아버지가 이조판서가 되자 상피법(相避法)에 따라 정언으로 전직되었다. 이 때 후임으로 친구인 류영길(柳永吉)을 추천하여 대간의 심한 반발을 받았으며 그 뒤 관직이 삭탈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평에서 적에게 화를 입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 곤좌이다.
정오(正吾) 1714∼178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심(子心), 대군의 13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9대손이고 현감 중태(重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양홍씨 첨지 수()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진주소씨로 대유(大有)의 딸, 증 정부인 청송심씨로 경력 동려(東呂)의 딸, 그리고 증 정부인 파평윤씨로 정(禎)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거쳐 사간 · 집의를 역임한 다음, 1779년(영조 44) 문산만호로 나갔다가 다음 해 들어와 다시 집의가 되고 곧 사간으로 전보되었다. 1781년(영조 46) 집의에서 당상인 승정원 승지로 승계되었으며 그 후 증 가선대부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 화산에 있다.
1753년(영조 29)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거쳐 사간 · 집의를 역임한 다음, 1779년(영조 44) 문산만호로 나갔다가 다음 해 들어와 다시 집의가 되고 곧 사간으로 전보되었다. 1781년(영조 46) 집의에서 당상인 승정원 승지로 승계되었으며 그 후 증 가선대부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 화산에 있다.
제달(濟達) 1791∼185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거경(巨卿), 대군의 14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0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현묵(顯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풍김씨로 판서 익휴(翊休)의 딸이다. 배위는 풍산심씨로 현감 경(儆)의 딸과 여흥민씨이다.
1835년(헌종 1) 증광 문과 전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1842년(헌종 8) 홍문록 회권에서 4점을 얻어 입권되고 5개월 후 2차 선발 고과인 도당록 회권에서도 4점을 얻어 선발되었다. 동 8월에는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18개 지역의 근무태만 수령들을 징계토록 서계하였고 1848년(헌종 14)에는 장령 패초(牌招)를 어긴 문책으로 호남의 연해로 귀양갔다. 1850년(철종 1) 부사과로 효정전 작헌례 때 대축을 맡아 봉행 후 가자되어 승지가 되고 1854년(철종 5) 사간원 대사간이 됐다.
묘소는 장단 판부리에 있다.
1835년(헌종 1) 증광 문과 전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1842년(헌종 8) 홍문록 회권에서 4점을 얻어 입권되고 5개월 후 2차 선발 고과인 도당록 회권에서도 4점을 얻어 선발되었다. 동 8월에는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18개 지역의 근무태만 수령들을 징계토록 서계하였고 1848년(헌종 14)에는 장령 패초(牌招)를 어긴 문책으로 호남의 연해로 귀양갔다. 1850년(철종 1) 부사과로 효정전 작헌례 때 대축을 맡아 봉행 후 가자되어 승지가 되고 1854년(철종 5) 사간원 대사간이 됐다.
묘소는 장단 판부리에 있다.
제민(齊閔) 1528∼161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은(景誾), 호는 서간(西澗), 대군의 현손이며 함원군 옹(춳)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현부인 평강채씨로 절충장군 중경(仲卿)의 딸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무안박씨로 옹의 딸과 정경부인 풍양조씨로 찰방 덕기(德基)의 딸이다.
1552년(명종 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 수찬 · 병조정랑 · 이조정랑 · 지평 · 홍문관 교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66년(명종 21) 중시에서 병과로 합격한 다음 1571년(선조 4) 경주부윤과 양주목사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쌓아 경기감사에 기용되었다. 이어서 대사간과 대사헌을 맡아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흐트러진 국론을 조정하여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 후 형조판서를 거쳐 1594년(선조 27) 지충주부사에 보임되면서 숭정대부(종1품)에 승자되고 기로소(耆老所)에 입사되었으며, 사후에는 좌의정에 추증됐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고기리 광교산 자좌이다.
1552년(명종 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 수찬 · 병조정랑 · 이조정랑 · 지평 · 홍문관 교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66년(명종 21) 중시에서 병과로 합격한 다음 1571년(선조 4) 경주부윤과 양주목사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쌓아 경기감사에 기용되었다. 이어서 대사간과 대사헌을 맡아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흐트러진 국론을 조정하여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 후 형조판서를 거쳐 1594년(선조 27) 지충주부사에 보임되면서 숭정대부(종1품)에 승자되고 기로소(耆老所)에 입사되었으며, 사후에는 좌의정에 추증됐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고기리 광교산 자좌이다.
조영(祖榮) 1782∼185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백승(伯繩), 대군의 15대손이며 장제부정의 12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상종(相琮)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순흥안씨로 참판 겸제(兼濟)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해평윤씨로 교리 제동(悌東)의 딸이다.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어 참봉 · 사어 · 이조정랑을 지내다가 1834년(순조 34) 식년 문과 전시에서 제술에 수석하여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1835년(헌종 1) 6월 25일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1837년(헌종 3) 1월 30일 참의로 올라 이듬해 11월 25일 사간원의 대사간이 되었다. 1839년(헌종 5) 9월 30일 의주부윤 재직시 몰래 침입한 양한(洋漢)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일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 7월 사간원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묘소는 양주 덕치에 있다.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어 참봉 · 사어 · 이조정랑을 지내다가 1834년(순조 34) 식년 문과 전시에서 제술에 수석하여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1835년(헌종 1) 6월 25일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1837년(헌종 3) 1월 30일 참의로 올라 이듬해 11월 25일 사간원의 대사간이 되었다. 1839년(헌종 5) 9월 30일 의주부윤 재직시 몰래 침입한 양한(洋漢)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일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 7월 사간원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묘소는 양주 덕치에 있다.
종령(宗齡) 1694∼176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원경(元卿), 대군의 10대손으로 돈녕부도정 성한(聖漢)의 아들이다.
1763년(영조 39) 70세에 기로정시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과천시 삼현에 있다.
1763년(영조 39) 70세에 기로정시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과천시 삼현에 있다.
주범(周凡) 1795∼187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대여(大汝), 초휘는 휘복(輝復), 호는 복주( 州). 대군의 13대손이며 장양도정의 10대손으로 증 호조참판 범은(範殷)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우봉이씨로 제관(濟寬)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칠원윤씨로 광국(匡國)의 딸이다.
1865년(고종 2) 71세의 고령으로 친림 춘당대 식년 문과 전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통정대부 병조참의 및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제수되었다. 1867년(고종 4) 초휘 휘복을 주범으로 개명했으며 1874년(고종 11) 가선대부로 승자되어 종정경에 호군으로 보임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이안면 와운동 정좌이다
1865년(고종 2) 71세의 고령으로 친림 춘당대 식년 문과 전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통정대부 병조참의 및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제수되었다. 1867년(고종 4) 초휘 휘복을 주범으로 개명했으며 1874년(고종 11) 가선대부로 승자되어 종정경에 호군으로 보임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이안면 와운동 정좌이다
중경(重庚) 1680∼175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백야(白也), 호는 쌍호(雙湖), 대군의 12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8대손이며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석령(錫齡)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창원황씨로 첨정 응로(應老)의 딸이며 배위는 증 정경부인 대구서씨로 증 영의정 정간공(貞簡公) 종제(宗悌)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에 진사를 지냈고 1727년(영조 3)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 · 헌납 · 장령 · 집의 · 사간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1743년(영조 19) 동궁(東宮) 관례(冠禮) 때 전교관(傳敎官) 우승지를 담당, 가자되어 공조참판으로 승계되고, 대사간을 거쳐 도승지를 역임한 다음 1756년(영조 32) 공조판서에 승차되고, 다음 해 숭정대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동두천시 동안동 해좌에 있다. 참판 중복이 지은 비문과 표석이 있다.
1702년(숙종 28)에 진사를 지냈고 1727년(영조 3)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 · 헌납 · 장령 · 집의 · 사간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1743년(영조 19) 동궁(東宮) 관례(冠禮) 때 전교관(傳敎官) 우승지를 담당, 가자되어 공조참판으로 승계되고, 대사간을 거쳐 도승지를 역임한 다음 1756년(영조 32) 공조판서에 승차되고, 다음 해 숭정대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동두천시 동안동 해좌에 있다. 참판 중복이 지은 비문과 표석이 있다.
중계(重繼) 1566∼161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술부(述夫), 호는 송파(松坡). 대군의 6대손이며 강성도정의 증손으로 부사직(副司直) 경림(景霖)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숙인 광주안씨로 집의(執義) 사언(士彦)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안동김씨로 부사 시회(時晦)의 딸이다.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1615년(광해군 7)에 부수(副率)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조정랑으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문학 · 헌납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을 때 대북(大北)의 음모로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당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삭직당했으며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쌍동리 선산 건좌이다. 참판 조희일(趙希逸)이 짓고 외증손 지평 조형기(趙亨期)가 쓴 표석과 신도비가 있다.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1615년(광해군 7)에 부수(副率)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조정랑으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문학 · 헌납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을 때 대북(大北)의 음모로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당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삭직당했으며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쌍동리 선산 건좌이다. 참판 조희일(趙希逸)이 짓고 외증손 지평 조형기(趙亨期)가 쓴 표석과 신도비가 있다.
중관(重觀) 1674∼173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국빈(國賓), 호는 사춘헌(四春軒), 대군의 12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인 전성군의 8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하령(夏齡)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함양오씨로 정자(正字) 첨경(添慶)의 딸이고 배위는 정부인 청송심씨로 서윤(庶尹) 상찬(尙燦)의 딸이다.
생원으로 참봉을 하다가 1719년(숙종 45)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1724년(경종 4) 지평이 되고, 장령을 거쳐 1727년(영조 3) 헌납 · 상의원(上衣院) 정(正) · 집의 등을 역임한 다음 승지로 승계되었다. 1728년(영조 4) 영천군으로 가게 된 정호(鄭澔)와 순안현으로 가게 된 민진원(閔鎭遠)의 유배지를 원주로 개정한 영조대왕의 조치에 반대하다 파직되었다. 그 후 1731년(영조 7) 다시 좌부승지에 기용되었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홍농읍 죽곡 선산 신좌이다. 중복(重馥)이 짓고, 용순(龍純)이 쓴 비석이 있다. 유고로 2권이 가장(家藏)되고 있다.
생원으로 참봉을 하다가 1719년(숙종 45)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1724년(경종 4) 지평이 되고, 장령을 거쳐 1727년(영조 3) 헌납 · 상의원(上衣院) 정(正) · 집의 등을 역임한 다음 승지로 승계되었다. 1728년(영조 4) 영천군으로 가게 된 정호(鄭澔)와 순안현으로 가게 된 민진원(閔鎭遠)의 유배지를 원주로 개정한 영조대왕의 조치에 반대하다 파직되었다. 그 후 1731년(영조 7) 다시 좌부승지에 기용되었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홍농읍 죽곡 선산 신좌이다. 중복(重馥)이 짓고, 용순(龍純)이 쓴 비석이 있다. 유고로 2권이 가장(家藏)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