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규영(珪永) 1827∼ ?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규옥(圭玉), 영성군의 7대손이며 정준(鼎俊)의 아들이다.
 1851년(철종 2) 전강시(殿講試) 문과에 급제하였고, 1866년(고종 3) 중시에 합격하여 이조참판 · 성균관 대사성 · 판서를 지냈다.
 묘소는 실전되었고, 배위는 안동권씨와 수성최씨이다.
 
규헌(奎憲) 1782∼1852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경오(景五), 영성군의 5대손이고 명묵(命默)의 아들이다. 혜릉 참봉, 여주목사를 지냈고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올랐다.
 묘소는 충북 보은군 산외면 영곡 건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이다.
기헌(基憲) 1763∼1804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온중(溫中), 영성군의 5대손이며 명훈(命勳)의 아들이다.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다. 1804년 6월 3일 별세하였고, 이조참판 ·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영성군 선영 을좌에 있다.
 배위는 정부인 청풍김씨와 정부인 안동권씨이다.
명걸(命杰) 1730∼1793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사겸(士?), 해흥군의 계자로 생부는 해청군이다. 홍릉참봉을 거쳐 성주목사를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영성군 선영 건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남양홍씨이다.
명훈(命勳) 1734∼1790    파명:영성군(寧城君)
  초휘는 명규(命珪), 자는 성집(聖集). 해영도정의 계자이고 생부는 상문(尙文)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묘소는 영성군 선영 자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순흥안씨이다.
명희(命) 1737∼1783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사순(士淳), 해운군의 장남이다.
 홍릉 참봉, 양근군수를 지냈다.
 묘소는 해운군 묘하 간좌이다.
 배위는 연일정씨이다.
요헌(堯憲) 1766∼1815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계술(季述), 호는 소소옹(笑笑翁), 시호는 숙열(肅烈). 성주목사 명걸(命杰)의 아들이다. 뛰어나게 영리하여 어려서부터 숙성하였다. 1785년(정조 9)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 처음에 도총부 도사, 1811년(순조 11)에 평안도 병마절도사, 좌포도대장을 재임하였으나 형이 황주목사로 있는 관계로 사직했다. 그 해에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특명으로 강서순무사가 되어 그의 묘책으로 정주성벽을 화약으로 폭파하여 적을 평정한 공으로 원훈의 호가 내렸으나 사퇴했다.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 · 금위대장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지중추부사 · 지의금부사 · 지훈련원사를 겸하였고, 1814년(순조 14)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사려가 깊고 판단성이 있는 한편 풍류를 즐길 줄 알고 신의가 두텁고 문무를 겸비하였다. 또한 당시 예조판서 김의순(金義淳)이 공의 업적을 시장(諡狀)으로 만들어 내려오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자곡면 어은동 건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반남박씨로 판돈녕 증 영의정 준원(準源)의 딸이며 묘는 합부이다.
원영(元永) 1809∼1884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공응(公膺), 영성군의 7대손이다.
 종친부 참봉,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올랐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수신면 음천리 신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평산신씨와 숙부인 임천조씨이다.
정모(鼎謨) 1815∼1878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우삼(虞三), 영성군의 6대손이며, 규헌(奎憲)의 아들이다. 1846년(철종 12) 진사시에 장원급제를 하였고 같은 해 선릉참봉을 지냈으며 광주목사, 종친부 정(正)을 지냈다.
 묘소는 영성군 선영 임좌이다.
 배위는 대구서씨이다.
정민(鼎民) 1800∼1865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성신(聖新), 요헌의 차남이다.
 사릉참봉,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에 올랐다.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 남종리 건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권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