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景) 1624∼1683    파명:양원군(楊原君)
 경(景) [1624(인조 2)∼1683(숙종 9)]
 양원군의 현손이며 상원군의 차남으로 1624년(인조 2)에 태어나 1683년(숙종 9) 3월 23일에 별세하였다. 부친의 충절을 이어 충성심과 효심이 지극하고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절충장군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야당2리 솔뫼(송산) 신좌에 안장하였다.
광노(光魯) 1769∼1840    파명:양원군(楊原君)
  광노(光魯) [1769(영조 45)∼1840(헌종 6)]
 양원군의 9대손으로 통정대부 동필의 아들이다.
 1769년(영조 45) 5월 16일 태어나 1840년(헌종 6) 12월 16일에 별세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였고 문명이 관리들 사이에서 뛰어났으며, 품계는 통정대부로 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동래정씨 유의 딸로 4남 1녀를 두었으며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장남은 치영(致英) · 차남은 채영(采英) · 3남은 원영(遠英) · 4남은 조영(肇英)이다. 딸은 반남박씨 관원(觀源)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상성북리 북쪽 술좌에 있다.
근수(根洙) 1854∼ ?    파명:양원군(楊原君)
 근수(根洙) [1854(철종 5)∼ ? ]
 양원군의 13대손이며 사원 하승(夏承)의 아들로 1854년(철종 5) 8월 16일에 태어났다. 혜민원 주사로 임명되어 황해도 지계위원으로 육품을 승진하여 승훈랑이 되어 황해도 봉산군 지방위원을 맡았다. 1904년 정월에 각국의 공사관에서는 거류민보호를 이유로 군대 병력을 주둔하니 민심이 흉흉하고 재정이 꽉 막혔었으며 양식을 나르는 길도 통하지 않아 빈민들이 대부분 기아에 시달렸다.
 그 정상을 긍휼히 여겨 곡식을 나누어 빈민을 구제하니 이 지방 군수겸 관찰서리 홍세영(洪世榮)이 조정에 포상을 청하였다. 배위 진주강씨는 주환의 딸이며 5남을 두었으니 인훈(仁薰) · 의훈(義薰) · 예훈(禮薰) · 지훈(智薰) · 신훈(信薰)이다.
 
도원(度遠) 1684∼1742    파명:양원군(楊原君)
  도원(度遠) [1684(숙종 10)∼1742(영조 18)]
 자는 기보(器甫), 호는 남록(南麓). 양촌거사 성석의 아들이다.
 1684년(숙종 10) 12월 28일에 태어나 1742년(영조 18) 4월 19일 별세했다. 수암(遂庵)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 1720년(숙종 46)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듬해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1723년(경종 3)에 한림 응교 제주순찰사로 상소를 올려 우율 · 우춘의 무고를 밝혔으며 또 사화 때에는 극간을 하였다. 지조를 지킬줄 알았고 몸을 공경히 하였으며 강석에서는 온화한 직학사이며 관청에서는 단아하고 청렴하여 옛사람의 풍모를 갖추었다. 묘소는 장단 상도면 도모동 간좌에 있다.
 유고 3권은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다. 배위는 청주한씨로 첨지를 지낸 서갑(瑞甲)의 딸로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명철(命徹)은 흥원(興遠)의 후사가 되었고 차남은 명준(命駿)이며 딸은 경주김씨 한역(漢繹)에게 출가했다.
동규(東奎) 1769∼1833    파명:양원군(楊原君)
  동규(東奎) [1769(영조 45)∼1833(순조 33)]
 자는 자국(子國), 호는 성암(醒菴). 양원군의 8대손으로 1769년(영조 45) 4월 10일에 태어나 1833년(순조 33) 12월 12일에 별세하였다. 배위는 언양김씨 치명(致命)의 딸로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종도(宗道), 차남 종매(宗邁), 3남은 종수(宗遂)이다. 묘소는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의 오장동에 예장하였다.
만석(萬錫) 1675∼1736    파명:양원군(楊原君)
  만석(萬錫) [1675(숙종 1)∼1736(영조 12)]
 자는 규백(圭白), 호는 근독당(謹獨堂). 양원군의 6대손으로 1675년(숙종 1) 3월 3일 태어나 1736년(영조 12) 6월 28일에 별세하였다. 공의 모친은 혜강공 이조판서 팽(彭)의 7대손으로 학포선생이 부친이다. 증조인 송은(松隱)공의 유훈을 잘 계승하여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행실을 닦아 경서에 밝았다.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여 여성산 아래 계곡에 들어가 집을 짓고 그곳에 살면서 편액을 쓰기를 근독당(謹獨堂)이라 하였다. 능주의 신풍면 화학산 유좌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제주양씨로 1남 흠을 두었다.
만영(晩英) 1779∼1839    파명:양원군(楊原君)
 만영(晩英) [1779(정조 3)∼1839(헌종 5)]
 자는 송여(松汝), 양원군의 10대손으로 윤행의 아들이다. 1779년(정조 3) 8월 7일 태어나 1839년(헌종 5) 8월 23일에 별세하였다. 성담선생의 문인으로 학행이 뛰어났으며, 배위는 함양박씨이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병도(炳道) · 차남은 병덕(炳德) · 3남은 병의이며 딸은 동래정씨 위갑(緯甲)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아산 금정리 응봉산 북쪽 산기슭 건좌에 있다.
명복(命馥) 1708∼1789    파명:양원군(楊原君)
  명복(命馥) [1708(숙종 34)∼1789(정조 13)]
 자는 여훈(汝薰), 양원군의 7대손으로 1708년(숙종 34) 6월 2일에 태어나 1789년(정조 13) 9월 20일에 향년 82세로 별세하였다. 모친은 반남박씨로 첨지중추부사 태서(泰舒)의 딸이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며 천품이 인후하고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였다. 배위는 풍양조씨로 이조참판에 증직된 택명(宅命)의 딸이다. 흥일(興一)과 흥경(興慶)의 2남과 1녀를 두었으며 흥일은 쌍계공의 후사가 되고 흥경은 진사가 되었다. 딸은 첨추인 조진곤(趙鎭坤)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후곡 미륵동 간좌에 예장하였다.
명준(命駿) 1714∼1770    파명:양원군(楊原君)
  명준(命駿) [1714(숙종 40)∼1770(영조 46)]
 자는 응휴(應休), 초휘는 명행(命行). 도원(度遠)의 둘째 아들로 1714년(숙종 40) 9월 8일 태어나 1770년(영조 46) 5월 6일에 별세하였다. 배위는 숙인 은진송씨 · 진주강씨 · 해주정씨이다. 흥철(興撤)과 흥연(興淵) 두 아들을 두었고 두 딸을 두어 장녀는 기계유씨 한기(漢基)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현감인 안동김씨 대순(大淳)에게 출가했다.
명흠(命欽) 1693∼1742    파명:양원군(楊原君)
  명흠(命欽) [1693(숙종 19)∼1742(영조 18)]
 자는 경보(敬甫), 양원군의 7대손으로 1693년(숙종 19) 8월 27일에 태어나 1742년(영조 18) 7월 16일에 향년 50세로 별세하였다. 모친은 신인 반남박씨로 참판에 증직된 태서(泰舒)의 딸이다. 공은 수신하여 행동이 결백하였고 뜻이 높았고 배움을 좋아하며 문장에 능하였다. 배위는 숙인 진주류씨로 봉사 민정(敏廷)의 딸이다.
 배위 숙인 현풍곽씨는 사인 지성(之誠)의 딸이며, 배위 숙인 경주김씨는 사인 선의 딸이다. 모두 후사가 없어 명복(命馥)의 아들인 흥일(興一)을 양자로 맞이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후곡 선영 임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