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4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가철(可哲) 1757∼1815 파명:영해군(寧海君)
  가철(可哲) [1757(영조 33)∼1815(순조 15)]
자는 익보(益甫), 호는 사물재(思勿齋). 존양당(存養堂) 유시(惟時)의 차남이다. 사헌부 감찰에 증직되었다. 이단과 사학이 횡행하던 당시에 훈장을 하면서 향약의 준수와 실행에 힘쓰는 동시에, 조정에서 조언을 구하면 음양변화와 풍속퇴폐와 민정의 득실이며, 언로의 막힘과 용인불신(用人不愼)과 사치풍조를 지적하는 등 소신있고 거침없는 주장을 펼쳐 관리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어느날 밤에 한 노인이 `勿\'자를 써 보이므로 사물재(思勿齋)라고 호를 정했다. 워낙 효자라 조카 행권(行權)과 시권(時權)의 효행과 더불어 일문삼효(一門三孝)의 정려문을 받았다. <사물재집(思勿齋集)> 3권이 있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덕과면 신양리 산40번지에 있다.
자는 익보(益甫), 호는 사물재(思勿齋). 존양당(存養堂) 유시(惟時)의 차남이다. 사헌부 감찰에 증직되었다. 이단과 사학이 횡행하던 당시에 훈장을 하면서 향약의 준수와 실행에 힘쓰는 동시에, 조정에서 조언을 구하면 음양변화와 풍속퇴폐와 민정의 득실이며, 언로의 막힘과 용인불신(用人不愼)과 사치풍조를 지적하는 등 소신있고 거침없는 주장을 펼쳐 관리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어느날 밤에 한 노인이 `勿\'자를 써 보이므로 사물재(思勿齋)라고 호를 정했다. 워낙 효자라 조카 행권(行權)과 시권(時權)의 효행과 더불어 일문삼효(一門三孝)의 정려문을 받았다. <사물재집(思勿齋集)> 3권이 있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덕과면 신양리 산40번지에 있다.
가춘(可春) 1735∼1809 파명:영해군(寧海君)
  가춘(可春) [1735(영조 11)∼1809(순조 9)]
자는 경지(慶之), 호는 소검당(疏儉堂). 시산군의 8대손이며 사복시정 유강(惟綱)의 차남이다.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현조 시산군이 설원되고 증직되었지만 시호의 은전이 내려지지 않는 것에 통분하여 상언(上言)하자 시산군에게 시호 문민(文愍)이 내려졌으며 남원 매계서원에 문민공을 봉안하게 된 것이 모두 공의 심역이 경주된 결과이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대산면 좌사촌 임좌원에 있다.
자는 경지(慶之), 호는 소검당(疏儉堂). 시산군의 8대손이며 사복시정 유강(惟綱)의 차남이다.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현조 시산군이 설원되고 증직되었지만 시호의 은전이 내려지지 않는 것에 통분하여 상언(上言)하자 시산군에게 시호 문민(文愍)이 내려졌으며 남원 매계서원에 문민공을 봉안하게 된 것이 모두 공의 심역이 경주된 결과이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대산면 좌사촌 임좌원에 있다.
광수(光壽) 1896∼1948 파명:영해군(寧海君)
  광수(光壽) [1896∼1948]
자는 인옥(仁玉), 호는 설산(雪山). 시산군 의 14대손이며 참봉 현기의 4남이다.
공은 임실군 오수(獒樹)보통학교 선생으로 재직 중, 마을을 돌며 청년회와 농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에 힘써 왔다. 3 · 1운동 소식을 듣고 숙부 매호공과 상의하여 상경하여 손병희(孫秉熙) 선생의 지령을 받고 수십 장의 독립선언서를 간직하고 내려와서, 문중 어른을 비롯하여 임실군 지도인물과 청년회 · 농민회 등을 돌며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3 · 1운동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에 3월 11일, 3월 15일, 3월 23일, 4월 3일, 4월 4일의 크고 작은 거사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공이 자신의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하고 모든 정보를 신속히 알려줌으로써 얻어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공의 비밀활동이 드러나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을 계속하다가 탄로되어 동경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귀국 후 리왕직(李王職) 예식과 전사(典事)를 역임하였다.
제자들과 뜻있는 인사들이 힘을 모아 현 오수초등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세워 공을 기렸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방축상 자좌에 있다.
자는 인옥(仁玉), 호는 설산(雪山). 시산군 의 14대손이며 참봉 현기의 4남이다.
공은 임실군 오수(獒樹)보통학교 선생으로 재직 중, 마을을 돌며 청년회와 농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에 힘써 왔다. 3 · 1운동 소식을 듣고 숙부 매호공과 상의하여 상경하여 손병희(孫秉熙) 선생의 지령을 받고 수십 장의 독립선언서를 간직하고 내려와서, 문중 어른을 비롯하여 임실군 지도인물과 청년회 · 농민회 등을 돌며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3 · 1운동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에 3월 11일, 3월 15일, 3월 23일, 4월 3일, 4월 4일의 크고 작은 거사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공이 자신의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하고 모든 정보를 신속히 알려줌으로써 얻어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공의 비밀활동이 드러나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을 계속하다가 탄로되어 동경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귀국 후 리왕직(李王職) 예식과 전사(典事)를 역임하였다.
제자들과 뜻있는 인사들이 힘을 모아 현 오수초등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세워 공을 기렸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방축상 자좌에 있다.
교영(敎英) 1786∼1850 파명:영해군(寧海君)
  교영(敎英) [1786(정조 10)∼1850(철종 1)]
자는 자유(子有), 호는 곡양(穀?). 참판공 원묵(元默)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경주김씨이다.
1844년(헌종 10)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 주서(注書) · 이조좌랑 · 이조정랑 ·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목관리에 있다.
자는 자유(子有), 호는 곡양(穀?). 참판공 원묵(元默)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경주김씨이다.
1844년(헌종 10)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 주서(注書) · 이조좌랑 · 이조정랑 ·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목관리에 있다.
덕일(德一) 1536∼1599 파명:영해군(寧海君)
  덕일(德一) [1536(중종 31)∼1599(선조 32)]
자는 여함(汝咸), 호는 지암(止菴). 평성수(平城守) 질(?)의 아들로 영해군의 현손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청주한씨와 정경부인 남양홍씨이다.
선조의 지조를 굳게 지켜 벼슬의 영달을 물리치고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학덕과 덕망이 뛰어나 마침내 44세 때 1579년(선조 12) 사헌부 장령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조참의,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직책이 없었음에도 임금에 대한 충정을 지키고자 한 점이 인정되어 이항복(李恒福)의 주청으로 1599년(선조 32) 숭헌대부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임직 9일만에 몸져 앓고 다시 7일만에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순성부정(蓴城副正)의 증손 수종(壽宗)을 입후(入後)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81번지의 1 영해군파 종중 선영이다.
자는 여함(汝咸), 호는 지암(止菴). 평성수(平城守) 질(?)의 아들로 영해군의 현손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청주한씨와 정경부인 남양홍씨이다.
선조의 지조를 굳게 지켜 벼슬의 영달을 물리치고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학덕과 덕망이 뛰어나 마침내 44세 때 1579년(선조 12) 사헌부 장령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조참의,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직책이 없었음에도 임금에 대한 충정을 지키고자 한 점이 인정되어 이항복(李恒福)의 주청으로 1599년(선조 32) 숭헌대부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임직 9일만에 몸져 앓고 다시 7일만에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순성부정(蓴城副正)의 증손 수종(壽宗)을 입후(入後)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81번지의 1 영해군파 종중 선영이다.
도(燾) 1639∼1713 파명:영해군(寧海君)
  도(燾) [1639(인조 17)∼1713(숙종 39)]
자는 재경(載卿), 호는 용산(龍山). 영해군의 7대손이며 충의위(忠義衛) 동영(東英)의 아들이다.
천품이 영특하고 학식이 온중하고 심오하여 존주대의(尊周大義)에 밝아 <존양록(尊攘錄)>에 기록되었고 계룡산 밑에 있는 그의 서재 용산정사에서 많은 선비들과 의론하면서 비록 초야의 포의한사(布衣寒士)이지만 나라의 공족으로서 우국의 정성이 간절하였다. 1699년(숙종 25) 왕명에 의하여 최여천(崔與天)과 함께 <여지승람>을 편수하여 조정에 바쳤으며 <용성지(龍城誌)> 2권을 편집 출간하였다.
1781년(정조 5) 서재터에 사우를 중건하고 향사하다가 매계(梅溪) 하류 덕계(德溪)로 이건하고 서원명 매계를 덕계로 개칭하였다. 1898년(광무 2)에 훼철되고 1993년 다시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에 중건하였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보절면 서치리 산54의 1번지에 있다.
<용산집(龍山集)> 3권이 있다.
자는 재경(載卿), 호는 용산(龍山). 영해군의 7대손이며 충의위(忠義衛) 동영(東英)의 아들이다.
천품이 영특하고 학식이 온중하고 심오하여 존주대의(尊周大義)에 밝아 <존양록(尊攘錄)>에 기록되었고 계룡산 밑에 있는 그의 서재 용산정사에서 많은 선비들과 의론하면서 비록 초야의 포의한사(布衣寒士)이지만 나라의 공족으로서 우국의 정성이 간절하였다. 1699년(숙종 25) 왕명에 의하여 최여천(崔與天)과 함께 <여지승람>을 편수하여 조정에 바쳤으며 <용성지(龍城誌)> 2권을 편집 출간하였다.
1781년(정조 5) 서재터에 사우를 중건하고 향사하다가 매계(梅溪) 하류 덕계(德溪)로 이건하고 서원명 매계를 덕계로 개칭하였다. 1898년(광무 2)에 훼철되고 1993년 다시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에 중건하였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보절면 서치리 산54의 1번지에 있다.
<용산집(龍山集)> 3권이 있다.
돈기(敦器) 1851∼1925 파명:영해군(寧海君)
  돈기(敦器) [1851(철종 2)∼1925]
자는 윤경(允卿), 호는 삼재(三齋). 기와공(起窩公) 교남(敎南)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이다.
1885년(고종 22)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은 사양하고 충남 예산군 봉산면에 낙향하여 교화와 윤리로써 향토의 풍속을 순화시켜 오로지 시문 창작에만 힘썼다. 경기 광주 · 수원 등지에 흩어져 사는 일가를 불러 줄바위[息岩里]에 집성촌을 이루어 화목하게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이다.
자는 윤경(允卿), 호는 삼재(三齋). 기와공(起窩公) 교남(敎南)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이다.
1885년(고종 22)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은 사양하고 충남 예산군 봉산면에 낙향하여 교화와 윤리로써 향토의 풍속을 순화시켜 오로지 시문 창작에만 힘썼다. 경기 광주 · 수원 등지에 흩어져 사는 일가를 불러 줄바위[息岩里]에 집성촌을 이루어 화목하게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이다.
민제(敏躋) 1686∼1742 파명:영해군(寧海君)
  민제(敏躋) [1686(숙종 12)∼1742(영조 18)]
자는 사구(士求), 목사 언유(彦維)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이다.
1717년(숙종 43) 33세 때 사마시에 급제하여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충남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 서쪽 기슭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양주조씨로 2녀만 두었기 때문에, 참봉 태제(泰?)의 차남을 계자로 삼았다.
자는 사구(士求), 목사 언유(彦維)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이다.
1717년(숙종 43) 33세 때 사마시에 급제하여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충남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 서쪽 기슭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양주조씨로 2녀만 두었기 때문에, 참봉 태제(泰?)의 차남을 계자로 삼았다.
백린(伯麟) 1621∼1667 파명:영해군(寧海君)
  백린(伯麟) [1621(광해군 13)∼1667(현종 8)]
자는 성서(聖瑞), 시만(時萬)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안동권씨이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글자를 보기만 하면 이내 외워, 성장하면 이름을 떨치리라고 어른들이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1646년(인조 24) 26세 때 사마시에 뽑혀 승문원 추천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로 첫 벼슬한 뒤 1655년(효종 6) 30세 때 춘당시(春塘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 · 성균관 전적(典籍) · 예조좌랑 ·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황해도 도사(都事)로 나아갔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승진, 얼마 뒤 고산 찰방(察訪)으로 보직, 47세 때 개성부 경력(經歷)으로 전직되어, 이 해 가을 임지에서 향년 47세로 별세하였다.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청송심씨와 정경부인 상주박씨이며 3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묵전당공 산소 다른 묏부리 기슭에 3위 쌍폄으로 있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자는 성서(聖瑞), 시만(時萬)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안동권씨이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글자를 보기만 하면 이내 외워, 성장하면 이름을 떨치리라고 어른들이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1646년(인조 24) 26세 때 사마시에 뽑혀 승문원 추천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로 첫 벼슬한 뒤 1655년(효종 6) 30세 때 춘당시(春塘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 · 성균관 전적(典籍) · 예조좌랑 ·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황해도 도사(都事)로 나아갔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승진, 얼마 뒤 고산 찰방(察訪)으로 보직, 47세 때 개성부 경력(經歷)으로 전직되어, 이 해 가을 임지에서 향년 47세로 별세하였다.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청송심씨와 정경부인 상주박씨이며 3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묵전당공 산소 다른 묏부리 기슭에 3위 쌍폄으로 있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범수(範壽) 1893∼1945 파명:영해군(寧海君)
  범수(範壽) [1893(고종 30)∼1945]
자는 인석(仁錫), 시산군의 14대손이며 참봉 현기(玄器)의 3남이다.
숙부 석기와 뜻을 같이 하여 1919년 4월 3일 남원 읍내에서의 거사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망을 피해 피신한 후, 서울에서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을 찾아가 가입하고 전라북도지부 조직의 직책을 맡고 내려와 한태현(韓泰鉉) · 형갑수(邢甲洙) · 강경진(姜景鎭) 등과 지부를 조직하여 군자금 헌납의 임무를 수행하다 체포되어 3년의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영춘계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고 조경참봉(肇慶參奉)을 역임하였다.
국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 314호에 있다.
자는 인석(仁錫), 시산군의 14대손이며 참봉 현기(玄器)의 3남이다.
숙부 석기와 뜻을 같이 하여 1919년 4월 3일 남원 읍내에서의 거사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망을 피해 피신한 후, 서울에서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을 찾아가 가입하고 전라북도지부 조직의 직책을 맡고 내려와 한태현(韓泰鉉) · 형갑수(邢甲洙) · 강경진(姜景鎭) 등과 지부를 조직하여 군자금 헌납의 임무를 수행하다 체포되어 3년의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영춘계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고 조경참봉(肇慶參奉)을 역임하였다.
국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 314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