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건명(健命) 1663∼1722 파명:밀성군(密城君)
  건명(健命) [1663(현종 4)∼1722(경종 2)]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가 되고, 1686년(숙종 12) 알성문과에 급제, 옥구군수 · 충주목사 · 이조참의 · 이조판서 · 호조판서 · 우의정 · 좌의정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김창집(金昌集) · 조태채(趙泰采) · 리이명(李?命)과 공의 노론4대신이 세제(世弟)책봉을 주청하여 실현시키고, 공이 책봉주청자로 청나라에 간 동안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이 제거되고 1722년(경종 2) 귀국하는 즉시 의주에서 나로도(羅老島)로 유배되었다가 향년 60세로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1725년(영조 1) 영조대왕이 즉위하여 신원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사충서원을 세워서 봉안하였다. 그러나 다시 1727년(영조 3) 서원 훼손 후에 1730년(영조 6) 복관되고 1743년(영조 19) 부조지전(不?之典)이 내려졌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이장하였다가 그 후 인조대왕 장릉(長陵) 능소로 지정되어 다시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맥금리 간좌로 이장, 봉안하였다.
공은 시문이 뛰어나고 송설체(宋雪體)의 서체로도 유명하다. 문집에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 5책이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광산김씨와 정경부인 안동김씨이다.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가 되고, 1686년(숙종 12) 알성문과에 급제, 옥구군수 · 충주목사 · 이조참의 · 이조판서 · 호조판서 · 우의정 · 좌의정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김창집(金昌集) · 조태채(趙泰采) · 리이명(李?命)과 공의 노론4대신이 세제(世弟)책봉을 주청하여 실현시키고, 공이 책봉주청자로 청나라에 간 동안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이 제거되고 1722년(경종 2) 귀국하는 즉시 의주에서 나로도(羅老島)로 유배되었다가 향년 60세로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1725년(영조 1) 영조대왕이 즉위하여 신원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사충서원을 세워서 봉안하였다. 그러나 다시 1727년(영조 3) 서원 훼손 후에 1730년(영조 6) 복관되고 1743년(영조 19) 부조지전(不?之典)이 내려졌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이장하였다가 그 후 인조대왕 장릉(長陵) 능소로 지정되어 다시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맥금리 간좌로 이장, 봉안하였다.
공은 시문이 뛰어나고 송설체(宋雪體)의 서체로도 유명하다. 문집에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 5책이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광산김씨와 정경부인 안동김씨이다.
건용(建容) 1842∼1920 파명:밀성군(密城君)
  건용(建容) [1842(헌종 8)∼1920]
자는 순여(舜如), 병찬(秉瓚)의 장남이다. 진사를 지내면서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하고 만석꾼이라는 부명(富名)을 들으면서 검소 · 겸손 · 후덕을 겸비하여 소작인에게 도조를 적게 받고 대한제국 건국 후 토지개혁이 될 때에 강문중학과 명성여중에 많은 재산을 희사하여 교육사업에 공헌한 바 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에 있다.
자는 순여(舜如), 병찬(秉瓚)의 장남이다. 진사를 지내면서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하고 만석꾼이라는 부명(富名)을 들으면서 검소 · 겸손 · 후덕을 겸비하여 소작인에게 도조를 적게 받고 대한제국 건국 후 토지개혁이 될 때에 강문중학과 명성여중에 많은 재산을 희사하여 교육사업에 공헌한 바 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에 있다.
건호(建鎬) 1885∼1950 파명:밀성군(密城君)
  건호(建鎬) [1885(고종 22)∼1950)]
호는 우송, 중린의 장남이다.
3·1운동 때에 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인쇄기를 구입하여 대동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여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중에 대동단에서 열국에 호소하기 위해 상해로 가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공은 징역 3년의 언도를 받고 가혹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향리에서 국가 장래를 걱정하다가 별세했다.
묘소는 김제군 원촌면 공동묘지에서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 선영하에 이장하였다. 1982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다.
호는 우송, 중린의 장남이다.
3·1운동 때에 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인쇄기를 구입하여 대동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여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중에 대동단에서 열국에 호소하기 위해 상해로 가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공은 징역 3년의 언도를 받고 가혹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향리에서 국가 장래를 걱정하다가 별세했다.
묘소는 김제군 원촌면 공동묘지에서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 선영하에 이장하였다. 1982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다.
경여(敬輿) 1585∼1657 파명:밀성군(密城君)
  경여(敬輿) [1585(선조 18)∼1657(효종 8)]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또는 봉암(鳳巖), 시호는 문정(文貞). 수록(綏祿)의 장남이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예문관 검열) · 세자시강원 설서를 거쳐 성균관 전적 · 춘추관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다. 그 후 정언사서 도사를 거쳐 충원현감을 지내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관직을 떠나 부친이 오리 리원익과 함께 여주 초야에 묻혀서 지내는 곳으로 가서 시봉(侍奉)하였는데, 1620년(광해군 12)에 부친이 별세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에 공은 부교리로 입경하여 사간원 헌납 · 이조좌랑 · 한학교수를 역임하다가 1624년(인조 2)에 사인으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임금을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1626년(인조 4)에 호당에 들어 사가독서를 하고 이어 리원익의 종사관이 되었다. 1630년(인조 8)에 부제학 · 좌승지 ·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다시 귀경하였을 때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를 극력 반대하며 도성사수를 진언하고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1637년(인조 15) 경상도 관찰사 · 이조참판 겸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선비양성의 방책을 상주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대광보국 숭록대부에 올랐다. 공은 배청친명파(排淸親明派)로 지목되어 청나라로 소환되어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몇달 후에 봉림대군 환국 시에 대군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1642년(인조 20) 우의정을 제수받았으며 1644년(인조 22) 세자송환의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재차 심양에 억류되었으나 조정에서는 영중추부사로 하명하였고, 다음 해에 귀국하였다. 1646년(인조 24)에 소현세자빈 민회빈(愍懷嬪)의 사사(賜死)와 봉림대군의 세자책봉을 정면 반대하다가 인조대왕의 노여움을 사 1646년(인조 24)에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1648년(인조 26) 삼수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49년(인조 27) 아산으로 옮겨졌다. 이 무렵에 인조대왕이 승하하였으며 청나라 병사의 국경 침입이 빈번했다. 1650년(효종 1) 유배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복직되었다가 영의정의 하명을 받았다. 공은 명에 의하여 북벌준비로 전시체제를 확립하고 10만 양병, 10만 양마를 추진하던 중 1651년(효종 2) 청국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부여로 낙향하였다. 효종대왕은 공을 항상 대인선생(大人先生)이라 불렀고 우암 송시열이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의 8자를 대서특필하여 준 것을 공의 손자 이명(?命)이 백마강변 암석에 새기고 비각을 세웠는데, 대재각(大哉閣)이라는 사액이 내려져 지금까지 문화재로 보존되어 온다. 1654년(효종 5)에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1657년(효종 8)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공은 병자호란을 만나서 척화파로서 두 차례의 억류와 유배 및 강등을 당하는 등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도 북벌계획에 힘을 다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평생을 바쳤다.
시문에 능하고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문집으로는 <백강집(白江集)> 15권, <연보> 2권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에 있었다가 1678년(숙종 4)에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 안양동 인좌로 이장되었다. 신도비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 쓰고 문효공(文孝公) 김만중(金萬重)이 전(篆)하여 세웠으며 현재 포천군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이 배향된 진도 봉암서원(鳳巖書院)은 철거되었고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과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부산서원(浮山書院)에 사액이 내려졌다. 유품으로는 청나라에서 가지고 온 장도(粧刀) 1자루가 있어 11대손 만수(萬洙)가 소장하고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해평윤씨와 정경부인 풍천임씨이다. 해평윤씨는 향년 34세로 별세한 후 1623년(인조 1) 효녀정려(孝女旌閭)가 세워졌다. 묘는 공의 묘 수십보 윗쪽에 있다.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또는 봉암(鳳巖), 시호는 문정(文貞). 수록(綏祿)의 장남이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예문관 검열) · 세자시강원 설서를 거쳐 성균관 전적 · 춘추관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다. 그 후 정언사서 도사를 거쳐 충원현감을 지내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관직을 떠나 부친이 오리 리원익과 함께 여주 초야에 묻혀서 지내는 곳으로 가서 시봉(侍奉)하였는데, 1620년(광해군 12)에 부친이 별세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에 공은 부교리로 입경하여 사간원 헌납 · 이조좌랑 · 한학교수를 역임하다가 1624년(인조 2)에 사인으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임금을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1626년(인조 4)에 호당에 들어 사가독서를 하고 이어 리원익의 종사관이 되었다. 1630년(인조 8)에 부제학 · 좌승지 ·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다시 귀경하였을 때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를 극력 반대하며 도성사수를 진언하고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1637년(인조 15) 경상도 관찰사 · 이조참판 겸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선비양성의 방책을 상주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대광보국 숭록대부에 올랐다. 공은 배청친명파(排淸親明派)로 지목되어 청나라로 소환되어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몇달 후에 봉림대군 환국 시에 대군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1642년(인조 20) 우의정을 제수받았으며 1644년(인조 22) 세자송환의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재차 심양에 억류되었으나 조정에서는 영중추부사로 하명하였고, 다음 해에 귀국하였다. 1646년(인조 24)에 소현세자빈 민회빈(愍懷嬪)의 사사(賜死)와 봉림대군의 세자책봉을 정면 반대하다가 인조대왕의 노여움을 사 1646년(인조 24)에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1648년(인조 26) 삼수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49년(인조 27) 아산으로 옮겨졌다. 이 무렵에 인조대왕이 승하하였으며 청나라 병사의 국경 침입이 빈번했다. 1650년(효종 1) 유배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복직되었다가 영의정의 하명을 받았다. 공은 명에 의하여 북벌준비로 전시체제를 확립하고 10만 양병, 10만 양마를 추진하던 중 1651년(효종 2) 청국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부여로 낙향하였다. 효종대왕은 공을 항상 대인선생(大人先生)이라 불렀고 우암 송시열이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의 8자를 대서특필하여 준 것을 공의 손자 이명(?命)이 백마강변 암석에 새기고 비각을 세웠는데, 대재각(大哉閣)이라는 사액이 내려져 지금까지 문화재로 보존되어 온다. 1654년(효종 5)에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1657년(효종 8)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공은 병자호란을 만나서 척화파로서 두 차례의 억류와 유배 및 강등을 당하는 등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도 북벌계획에 힘을 다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평생을 바쳤다.
시문에 능하고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문집으로는 <백강집(白江集)> 15권, <연보> 2권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에 있었다가 1678년(숙종 4)에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 안양동 인좌로 이장되었다. 신도비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 쓰고 문효공(文孝公) 김만중(金萬重)이 전(篆)하여 세웠으며 현재 포천군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이 배향된 진도 봉암서원(鳳巖書院)은 철거되었고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과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부산서원(浮山書院)에 사액이 내려졌다. 유품으로는 청나라에서 가지고 온 장도(粧刀) 1자루가 있어 11대손 만수(萬洙)가 소장하고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해평윤씨와 정경부인 풍천임씨이다. 해평윤씨는 향년 34세로 별세한 후 1623년(인조 1) 효녀정려(孝女旌閭)가 세워졌다. 묘는 공의 묘 수십보 윗쪽에 있다.
공여(公輿) 1588∼1628 파명:밀성군(密城君)
  공여(公輿) [1588(선조 21)∼1628(인조 6)]
자는 대부(大夫), 성록(成祿)의 3남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 급제에 이어 1634년(인조 12) 숭록대부로 승계되어 부산진 첨사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병자호란으로 귀향치 못하게 되자 울산에서 잠시 살았다.
묘소는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발리 선양산 해좌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충주김씨로 묘는 합부이다.
자는 대부(大夫), 성록(成祿)의 3남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 급제에 이어 1634년(인조 12) 숭록대부로 승계되어 부산진 첨사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병자호란으로 귀향치 못하게 되자 울산에서 잠시 살았다.
묘소는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발리 선양산 해좌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충주김씨로 묘는 합부이다.
관명(觀命) 1661∼1733 파명:밀성군(密城君)
  관명(觀命) [1661(현종 2)∼1733(영조 9)]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 또는 백휴재(白休齋), 시호는 문정(文靖). 1687년(숙종 13) 사마시와 1698년(숙종 24) 알성문과에 급제, 교리 · 사인 · 이조정랑 · 승지 · 예조참판 ·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718년(숙종 44)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9년(숙종 45) 예조판서 · 양관 대제학, 1720년(숙종 46) 이조판서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에 노론4대가인 동생 건명(健命)이 극형을 받자 이에 연좌된 혐의로 억천에 유배되어 노복이 되었다. 그가 패랭이를 쓰고 동헌 뜰을 열심히 쓸자, 군수가 미안하여 만류했으나, 끝내 듣지 않고 일을 하였으며 공의 부지런함은 후세에 전하고 있다. 1725년(영조 1)에 방면되어 우의정 · 좌의정에 이르고, 1730년(영조 6) 기로소에 들어갔다.
문집에는 <병산집(屛山集)> 12권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경좌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덕수강씨와 정경부인 안동권씨이다.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 또는 백휴재(白休齋), 시호는 문정(文靖). 1687년(숙종 13) 사마시와 1698년(숙종 24) 알성문과에 급제, 교리 · 사인 · 이조정랑 · 승지 · 예조참판 ·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718년(숙종 44)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9년(숙종 45) 예조판서 · 양관 대제학, 1720년(숙종 46) 이조판서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에 노론4대가인 동생 건명(健命)이 극형을 받자 이에 연좌된 혐의로 억천에 유배되어 노복이 되었다. 그가 패랭이를 쓰고 동헌 뜰을 열심히 쓸자, 군수가 미안하여 만류했으나, 끝내 듣지 않고 일을 하였으며 공의 부지런함은 후세에 전하고 있다. 1725년(영조 1)에 방면되어 우의정 · 좌의정에 이르고, 1730년(영조 6) 기로소에 들어갔다.
문집에는 <병산집(屛山集)> 12권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경좌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덕수강씨와 정경부인 안동권씨이다.
극강(克綱) 1534∼1588 파명:밀성군(密城君)
  극강(克綱) [1534(중종 29)∼1588(선조 21)]
자는 자장(子長), 밀성군의 현손이며 광원군의 장남이다. 1556년(명종 11) 진사에 급제하고, 1564년(명종 19)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첨정을 지냈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정부인 온양정씨 숙(琡)의 딸이다.
묘소는 포천 쌍곡 선영하에 있다.
자는 자장(子長), 밀성군의 현손이며 광원군의 장남이다. 1556년(명종 11) 진사에 급제하고, 1564년(명종 19)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첨정을 지냈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정부인 온양정씨 숙(琡)의 딸이다.
묘소는 포천 쌍곡 선영하에 있다.
극륜(克綸) 1546∼1630 파명:밀성군(密城君)
 극륜(克綸)1546(명종1)-1630(인조8)
자는 자전(子全).
밀성군의 4대손이며 광원군의 4남이다.대사헌을 지냈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 망월산 대곡 뒤 해좌에 있다.
배위 정실(正室) 정부인(貞夫人) 문화류씨(1551-1607)는 찰방범(察謗範)의 딸이며
묘는 합부하였고,
부실(副室) 정부인 한양조씨(1568-1587)는 부사 필지(弼至)의 딸이며
묘소는 공의 묘 좌측 축좌이고,
부실(副室)정부인 창녕성씨(1556-1625)의 묘는 동면(同面)신동 뒤 사태봉 계좌이며
아들로 계자 승록(1573-1660), 2남 춘록(1582-1636), 3남 득록(1600-1664),
4남 만록(1603-1632), 5남 천록(1609-1634), 6남 덕록(1612-1680)을 두셨다.
자는 자전(子全).
밀성군의 4대손이며 광원군의 4남이다.대사헌을 지냈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 망월산 대곡 뒤 해좌에 있다.
배위 정실(正室) 정부인(貞夫人) 문화류씨(1551-1607)는 찰방범(察謗範)의 딸이며
묘는 합부하였고,
부실(副室) 정부인 한양조씨(1568-1587)는 부사 필지(弼至)의 딸이며
묘소는 공의 묘 좌측 축좌이고,
부실(副室)정부인 창녕성씨(1556-1625)의 묘는 동면(同面)신동 뒤 사태봉 계좌이며
아들로 계자 승록(1573-1660), 2남 춘록(1582-1636), 3남 득록(1600-1664),
4남 만록(1603-1632), 5남 천록(1609-1634), 6남 덕록(1612-1680)을 두셨다.
긍연(兢淵) 1737∼1797 파명:밀성군(密城君)
  긍연(兢淵) [1737(영조 13)∼1797(정조 21)]
자는 경지(敬之), 진국(鎭國)의 아들이며 진형(鎭衡)의 계자이다.
1774년(영조 50) 문과에 급제, 승지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조안리 건좌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반남박씨와 청송심씨이다.
자는 경지(敬之), 진국(鎭國)의 아들이며 진형(鎭衡)의 계자이다.
1774년(영조 50) 문과에 급제, 승지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조안리 건좌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반남박씨와 청송심씨이다.
대순(大純) 1602∼ ? 파명:밀성군(密城君)
  대순(大純) [1602(선조 35)∼ ? ]
자는 일지(一之), 호는 남포(南浦). 밀성군의 7대손이며 광성정의 5대손이고 규( )의 장남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1624년(인조 2) 증광별시 병과에 급제, 통정대부 평양부윤을 지냈다. 승지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구포리 선영하 건좌이고 승지 송징은(宋徵殷)이 찬한 묘표가 있다.
배위는 숙부인 해주정씨와 숙부인 평산신씨 두 분이 있다.
자는 일지(一之), 호는 남포(南浦). 밀성군의 7대손이며 광성정의 5대손이고 규( )의 장남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1624년(인조 2) 증광별시 병과에 급제, 통정대부 평양부윤을 지냈다. 승지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구포리 선영하 건좌이고 승지 송징은(宋徵殷)이 찬한 묘표가 있다.
배위는 숙부인 해주정씨와 숙부인 평산신씨 두 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