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4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견철(堅鐵) 1572∼1629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자강(子剛), 충청감사 충작의 장남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進士)에 합격했으나 인천에서 은거하다 인조반정 후 음사(陰士)로 경기 수운판관 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귀성(貴省) 1670∼1699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일삼(日三), 호는 삼성재(三省齋). 병조참의 효인(孝仁)의 아들이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워 8, 9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알았고, 부모공양의 도를 실천했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였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리니 3일 동안 회생하였다. 어머니 환후에도 이렇게 하니 사람들이 듣고 천거하였다. 이 사실이 <동국삼강록(東國三綱錄)>과 <정읍읍지>에 실려 있다.
자는 일삼(日三), 호는 삼성재(三省齋). 병조참의 효인(孝仁)의 아들이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워 8, 9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알았고, 부모공양의 도를 실천했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였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리니 3일 동안 회생하였다. 어머니 환후에도 이렇게 하니 사람들이 듣고 천거하였다. 이 사실이 <동국삼강록(東國三綱錄)>과 <정읍읍지>에 실려 있다.
득회(得會) 1770∼1824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정보(正輔), 호는 석촌(石村), 시호는 희헌(僖憲). 동지중추부사 의중(義重)의 아들이다. 문과로 승헌대부 행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만길(晩吉) 1607∼1667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경장(慶長), 호는 취은(醉隱). 견철(堅鐵)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정시 병과에 급제하여 사예(司藝) 등 청환(淸宦)을 지내고, 강원도 관찰사에 올랐다.
배위는 충주최씨 광형(光炯)의 딸이다.
묘소는 충남 태안군 태안읍 장산리에 있다.
배위는 충주최씨 광형(光炯)의 딸이다.
묘소는 충남 태안군 태안읍 장산리에 있다.
만영(晩榮) 1604∼1672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장춘(長春), 호는 설해(雪海). 충작의 손자이다. 1635년(인조 13) 알성문과에 급제, 그 해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장령 · 사간 · 청주목사를 지냈다. 1651년(효종 2) 집의(執義)로 진향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3년(효종 4) 사간이 되고, 이어 보덕(輔德) · 강원관찰사 등을 거쳐 1670년(현종 11) 대사간을 지냈다. 이듬해 사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참판에 전임됐다. 1672년(현종 13)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임지에서 별세했다. 공은 “학문이란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버리고 부질없이 성명을 논한들 무슨 보탬이 있으랴.”고 했다. 한가롭게 집에 있을 때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경사(經史)를 공부했다. 또한 <근사록>과 <심경(心鏡)>을 좋아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만창(晩昌) 1597∼1659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대군의 6대손으로 견봉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호가하여 1628년(인조 6) 영사훈(寧社勳)을 받았다.
묘소는 회덕 북면 방촌(芳村) 오좌에 있다.
배위는 숙인 남양홍씨이며 묘는 쌍봉이다. 2남을 두었다.
묘소는 회덕 북면 방촌(芳村) 오좌에 있다.
배위는 숙인 남양홍씨이며 묘는 쌍봉이다. 2남을 두었다.
몽룡(夢龍) 1571∼1634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응견(應見), 호는 운곡(雲谷). 홍산군(洪山君) 득(得)의 아들로서 음직으로 전부(典簿)를 지냈고 학행과 문장이 뛰어났다. 1608년(선조 41) 부친상을 당한 뒤로부터 나라의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몽서(夢瑞) 1540∼1621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중길(中吉), 대군의 현손이며 운양도정 원(元)의 아들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용모가 남달리 빼어났으며 의기가 활달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생원이 되고 이어 사직참봉으로 임진왜란 때 공이 있어 선무훈(宣武勳)의 녹을 받았다.
민좌(敏佐) 1640∼1714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달경(達卿), 호는 강제당(康濟堂). 통덕랑 홍벽(弘璧)의 아들이다. 공은 문학에 달통하고 문장을 바르게 쓰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벼슬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690년(숙종 16) 경기전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은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어버이의 강권으로 서울에 올라가 사은하고 돌아왔다. 아버지 석담공(石潭公)의 상을 당하여 예법에 따라 복상했다. 복상 후 장원서 별검에 임명되고, 1696년(숙종 22) 의금부 도사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글 짓는 재주가 뛰어나 붓을 들면 바로 문장을 이루었다. 금석문을 쓴 것이 많다.
사원(思元) 1848∼1921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영래(永來), 대군의 14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성익(成翼)의 현손이다. 1877년(고종 14)에 생원이 되어 학문에 정진하며 어려운 사람에게 많은 덕을 베풀었다.
1936년 6월 11일 회덕유림(懷德儒林)에서 발행한 <동헌비고(東獻備考)> `덕망(德望)\'란에 `자는 영래이고 완산리씨 동지중추 성익의 현손으로 성품이 어질고 후덕한 마음으로 친목을 돈독히 하였음은 물론이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고 걸인에게도 따뜻하게 대하였다. 아들 두규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덕을 베풀어 사람들이 효우(孝友)라고 칭송하였다.\'고 적혀 있다.
1936년 6월 11일 회덕유림(懷德儒林)에서 발행한 <동헌비고(東獻備考)> `덕망(德望)\'란에 `자는 영래이고 완산리씨 동지중추 성익의 현손으로 성품이 어질고 후덕한 마음으로 친목을 돈독히 하였음은 물론이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고 걸인에게도 따뜻하게 대하였다. 아들 두규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덕을 베풀어 사람들이 효우(孝友)라고 칭송하였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