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慶) 1586∼1634 파명:경녕군(敬寧君)
  가림군의 현손 유인(裕仁)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에 생원이 되어 정읍현감 및 전주진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묘소는 금릉군 남면 운남동 갑좌이다. 배위는 숙인 해주정씨로 현감 호학(好學)의 딸과 청송심씨 대사간 첨(詹)의 딸이다. 슬하에 익창(益昌) · 익성(益聖) · 익흥(益興) 3남을 두었다.
묘소는 금릉군 남면 운남동 갑좌이다. 배위는 숙인 해주정씨로 현감 호학(好學)의 딸과 청송심씨 대사간 첨(詹)의 딸이다. 슬하에 익창(益昌) · 익성(益聖) · 익흥(益興) 3남을 두었다.
경광(絅光) 1563∼161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일장(日章), 호는 도암(陶庵). 경녕군의 5대손으로 음성현감을 지낸 희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장수황씨로 현감 상(翔)의 딸이다. 수광의 종형이기도 하다.
12세에 이미 경사에 통하였으며, 그 뒤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여 전라도 장수에 살면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1597년(선조 30) 학행으로 군자감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고, 그 뒤 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사퇴하였다. 정경세 등과 교유, 학문을 강마(講磨)하였으며, 선배학자인 장현광과도 접촉, 은일적인 생활에 의기가 서로 합일하였다. 저서로 <도암문집(陶庵文集)> 2권이 있다.
12세에 이미 경사에 통하였으며, 그 뒤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여 전라도 장수에 살면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1597년(선조 30) 학행으로 군자감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고, 그 뒤 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사퇴하였다. 정경세 등과 교유, 학문을 강마(講磨)하였으며, 선배학자인 장현광과도 접촉, 은일적인 생활에 의기가 서로 합일하였다. 저서로 <도암문집(陶庵文集)> 2권이 있다.
경욱(慶郁) 1544~1592 파명:경녕군(敬寧君)
  단산도정의 증손 홍의 아들이다. 명종 때 사마를 지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태인현감으로 재임 중 조헌과 함께 싸우다 순절하였다.
묘소는 혼장(魂葬)으로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기일 선친묘 계하에 장례지냈다. 배위는 의인 경주정씨로 헌납 득(得)의 딸이다. 슬하에 돈(燉)이 있다.
묘소는 혼장(魂葬)으로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기일 선친묘 계하에 장례지냈다. 배위는 의인 경주정씨로 헌납 득(得)의 딸이다. 슬하에 돈(燉)이 있다.
계창(戒昌) 1540∼160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덕화(德華), 호는 지산(芝山). 오성군의 증손 득의의 아들이다. 문학이 탁월하였다. 벼슬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를 하였다.
묘소는 전남 나주시 남평읍 봉성산 해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밀양박씨로 통훈대부 승득(勝得)의 딸이다. 슬하에 승안(升安)을 두었다.
묘소는 전남 나주시 남평읍 봉성산 해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밀양박씨로 통훈대부 승득(勝得)의 딸이다. 슬하에 승안(升安)을 두었다.
곽(廓) 1590∼1665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여량(汝量), 시호는 충강(忠剛). 경녕군의 6대손이며 유인의 아들로 기골이 장대하였다. 이항복의 추천으로 1615년(광해군 7) 식년과의 무과에 장원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한때 궁중 금원에 들어온 범을 잡은 일이 있다. 이이첨이 문무백관을 위협하여 폐모론을 주장할 때 동조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때 돈화문 밖에서 수비하다가 밤에 반정군이 이르자 문을 열어 들어가게 하였다. 반정 후 그를 죽이려 하자 이귀가 길을 비켜준 그의 공을 역설하여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의 군에 들어가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우고 자산부사를 거쳐 부총관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회답사가 되어 심양에 갔을 때, 심양에서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왕을 황제로, 연호를 숭덕이라 하여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그의 일행을 조선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하였으나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그 의식에 불참하고 돌아왔다. 조정에서 그 사실을 잘못 전하여 듣고, 한때 선천에 유배시켰다가 뒤에 충절을 알고 석방하였다. 이해 호적이 침입하자 남한산성을 수비하는 데 활약하였고, 난이 끝난 뒤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641년(인조 19)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회답사가 되어 심양에 갔을 때, 심양에서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왕을 황제로, 연호를 숭덕이라 하여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그의 일행을 조선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하였으나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그 의식에 불참하고 돌아왔다. 조정에서 그 사실을 잘못 전하여 듣고, 한때 선천에 유배시켰다가 뒤에 충절을 알고 석방하였다. 이해 호적이 침입하자 남한산성을 수비하는 데 활약하였고, 난이 끝난 뒤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641년(인조 19)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광(퉠) ? ∼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경실(景實), 서원군의 둘째 아들이다. 현령을 지내고, 증 승지 통정대부 승정원 우승지,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서산 선영 묘좌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연안이씨로 부사 찬(璨)의 딸이다. 슬하에 용침(用沈) · 용택(用澤) · 용호(用浩) 3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서산 선영 묘좌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연안이씨로 부사 찬(璨)의 딸이다. 슬하에 용침(用沈) · 용택(用澤) · 용호(用浩) 3남을 두었다.
광보(廣溥) 1663∼1742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관숙(寬叔), 단산도정의 7대손 선(銑)의 아들이다. 용양위 부호군을 하고, 절충장군에 올랐다. 여러 대에 걸쳐 선산에 밭을 두어 비를 세웠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에는 집에 쌓아둔 400석을 군민들을 위해 썼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정상촌 선영하이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권씨로 권인(權仁)의 딸이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기(杞), 자(梓), 규(?)이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정상촌 선영하이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권씨로 권인(權仁)의 딸이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기(杞), 자(梓), 규(?)이다.
광욱(光郁) 1549∼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계광(啓光), 단산도정의 증손 홍의 아들이다. 장악원 직장으로 있다가 광해군 때에 청주에 은거했다. 인조반정 후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가선대부가 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송정동 옥혜산 솔밭공원 경내 간좌이다. 배위는 진주정씨 선무랑 강(?)의 딸이다. 슬하에 훈(煇) · 혁(爀) 2남을 두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송정동 옥혜산 솔밭공원 경내 간좌이다. 배위는 진주정씨 선무랑 강(?)의 딸이다. 슬하에 훈(煇) · 혁(爀) 2남을 두었다.
광하(光夏) 1740∼179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원서(元瑞), 단산도정의 10대손 명성(命誠)의 아들이다. 흉년에 집의 곡식 100석을 내놓아 빈곤한 사람을 도와 주었다. 또한 수리시설을 스스로 완성하여 천수답을 관개하자 임금이 그 공적을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하사하였다.
묘소는 전남 곡성군 삼기면 월경리 유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순흥안씨로 경룡(慶龍)의 딸과 창녕성씨 혼전(渾栓)의 딸이다. 슬하에 병수(秉綏) 1남을 두었다.
묘소는 전남 곡성군 삼기면 월경리 유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순흥안씨로 경룡(慶龍)의 딸과 창녕성씨 혼전(渾栓)의 딸이다. 슬하에 병수(秉綏) 1남을 두었다.
교성(喬成) 1680∼1762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국로(國老), 복성군의 8대손 행삼(行三)의 아들이다. 벼슬은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묘소는 당원 선조 동록 자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순흥안씨, 숙부인 진주류씨, 숙부인 능성구씨로 호(鎬)의 딸이다. 슬하에 진덕(鎭德)과 진민(鎭民) 2남을 두었다.
묘소는 당원 선조 동록 자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순흥안씨, 숙부인 진주류씨, 숙부인 능성구씨로 호(鎬)의 딸이다. 슬하에 진덕(鎭德)과 진민(鎭民) 2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