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대왕 - 경연에 나타난 왕자(王者)의 길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경연에 나타난 왕자(王者)의 길
경연(經筵)이라 함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유교 경전 및 사서,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문제들에 관한 서적 등을 통해 강독하면서 깨우침을 얻어 왕도를 행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경연은 조선시대의 중요한 정치제도였다. 조선왕조의 왕들은 매일 경연에 참석하여 경사(經史) 강의를 들을 의무가 있었으며, 실제로 여러 왕들이 경연에 부지런히 참석했다. 이들은 경연에서 경서와 사서를 반복하여 공부했는데 경서는 정치하는 원칙을 사서는 정치의 실례를 제시한 것이었다.
또한 당시의 정치 전반에 대해서도 자주 논의했으므로 경연은 조선시대의 정치의 이론과 실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무대라 하겠다.
조선에 있어서 경연의 시작은 정종때부터 그 틀이 갖춰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신하들과의 대화 속에서 정종이 가지고 있던 종교에 대한 여러 의문점과 치도에 대한 그의 입장, 그리고 신하들이 정종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현실사회에 대한 개혁의 논리 등이 바로 경연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당대 최고의 학문과 경륜을 갖춘 학자들로부터 유교경전 및 사서 등에 대한 강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종의 왕도정치를 완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정종은 경연을 통해서 비로소 왕으로서 행할 일을 갖춰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정종대에 이루어진 경연의 내용과 실상을 통해 정종의 학문적 심화정도, 그리고 유교정치 속에서 이루고자 했던 이상국가의 실현 등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왕조 5백년의 유교정치의 틀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주목은 학문의 발전정도와 군주가 행해야 할 치도 및 왕도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러면 시기별로 정종 은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겠다.
정종대왕 - 경연에 나타난 왕자(王者)의 길 (2)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먼저 집권초에 경연을 실시하면서 사관(史官)이 입시하지 않다가 비로소 원년 1월 7일에 경연에 대한 상소를 통해 사관이 입시하여 군주의 언동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음이 나타난다. 즉, 사관(史官)이 비로소 경연에 입시(入侍)하게 되었는데 그 연유는 처음에 정종이 사관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니,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두 번 청하였는데, 그는 그 간곡함에 따라 이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비로소 사관이 경연에 함께 참석하여 군주의 언동을 기록하게 되어 후대의 귀감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경연에서 있었던 자세한 내용들이 기록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학문적 토론만이 아닌 실제 정사에 통용되도록 그 내용을 바꿔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정종이 경연을 통해 살펴본 서적은 <논어>, 정자(程子)의 <사잠(四箴)>, <상서(商書)>, <대학연의(大學衍義)>, <위기(魏紀)>, <통감촬요(通鑑撮要)> 등으로 때에 따라 필요한 장을 강독하였던 것이다. 정종은 실제 고려조에서 자신이 직접 서연 시독관(書筵侍讀官)이 되었던 적이 있어 경연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고 있었고, 당연히 군주는 유신(儒臣)과 더불어 학문과 치도(治道)를 논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면 정종이 유신과의 강론에서 이루고자 한 치도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인군은 마땅히 마음을 다루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고 한 내용이었다. 정종 2년 정월 1일의 경 연에서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이 <통감촬요>를 진강(進講)한 내용 중
“인주(人主)의 학문은 글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열(傅說)이 은(殷)나라 고종(高宗)을 대하여 말하기를, `오직 학문은 뜻을 공손히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공손[遜]이라는 것은 마음을 비게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가린 것이 있으면, 한마디 말이나 한가지 일의 응(應)함이 반드시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한 대목에서 확인된다.
정종에게 있어서 경연은 처음에는 왕도와 치도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제 2차 왕자의 난으로 벌어진 형제간의 암투와 스스로 왕권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됨에 따라 그 내용은 점차 불교와 도교적인 측면으로 흐른 면이 있었다. 그가 왕위를 선양한 뒤 명찰대산을 찾아다닌 점을 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이와 더불어 2년 12월 1일에는 경연을 할 때 간관(諫官) 1인을 입시(入侍)케 하여, 과실이 있을 경우 직언하도록 하였다.
정종 때 이루어진 경연을 살펴보면, 인군의 학문을 수양하고 덕을 기르기 위해 마련되었으며 경연에 사관 1인과 간관 1인을 입시케하여 기록과 직언을 하도록하여 이를 제도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종은 조선의 경연제도의 기초를 확립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종대왕 - 군권(軍權)의 장악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군권(軍權)의 장악
정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의 사병(私兵)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것은 왕권의 원활한 운영과 군주권의 확립을 위해서도 반드시 이들 사병을 공병화하여야만 했다. 군권의 장악을 위한 실질적인 정치력은 동생 방원과의 합작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군웅할거적인 분산된 군사력을 국가통치하에 집중시켜 공병화시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과제였다.
이러한 사병(私兵)의 양성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태조가 즉위 초에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여 군무(軍務)를 장악케 하고 군사권의 통제를 꾀하면서도 훈친과 종친들에게는 사병의 양성을 그대로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국 초의 불안한 정정(政情) 속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신들과 왕실들의 사병은 국왕의 병권통수를 어렵게 하였다. 더욱이 왕위쟁탈전이었던 왕자의 난은 이들 사병을 기반으로 한 무력충돌이었음은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는 사병을 혁파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런데 군사력을 어떻게 통제하고 또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국가체제 하에 둘 것인가 하는 것은 단시간에 해결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신세력들과 왕실과의 관계속에서 그 군사력이 동원되는 예가 많이 있고, 또한 그들이 실제 국가운영 전반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 통제는 군무를 통괄하는 삼군부(三軍府)에 대한 규제로 나타난다. 삼군부는 왕실을 숙위하면서 중외의 군사일을 맡고 있었는데 감찰기능을 가진 사헌부에 대하여 논핵 함으로써 그 맡은바 일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헌부에서 삼군부를 규찰하여 삼군부의 운영과 실태를 규제케 하였다. 이것은 군무를 책임지는 삼군부에 대한 제한일 뿐만 아니라 군통수권을 전적으로 국왕이 행사케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듬해에 사병을 혁파하는 과정을 보면 그 목적이 과연 그러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종은 이러한 상황에서 동생 정안군과 함께 세자와 왕의 시위대를 제외한 일체의 사병을 혁파하는 한편, 지방에 있어서도 절제사를 파하고 그 소속의 군사를 모두 의흥삼군부에 편입하여 공병화함으로써 모든 병권을 왕 자신에게 집중시켰던 것이다.
정종 2년 4월 6일,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되고 새로이 세자로 책봉된 정안군과 함께 일차적으로 사병(私兵)을 혁파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권근과 김약채는 사병 양성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장문의 소(疏)를 올렸고 정종은 세자 정안군과 더불어 의논하여 곧 이를 그대로 시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는 각 도의 여러 절제사를 모두 혁파하고 서울과 외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에 소속케하고 동시에 사사로이 병기를 갖지 못하게 하였다.
병권을 삼군부로 집중시키고 그 명령체계를 국왕, 재상, 삼군부총제, 군사를 맡는 자의 순으로하여 병권이 흩어짐으로 해서 생기는 분란을 이제는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정국운영을 실행하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가시적인 힘이고, 그 힘은 바로 군사로 대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병권을 하나로 모으고 체계화시킨 이날의 작업은 정국의 안녕을 위해서 지극히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병혁파의 조치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에 대한 반발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연한 반발은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상황전개를 보면 큰 문제거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이저(李佇) · 이거이(李居易) 등은 이러한 사병혁파에 공공연히 불평을 하고 다녔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 친과 공신의 신분을 과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처벌을 엄히하여 더이상의 부작용을 방지했다. 정종은 이거이를 청주(淸州)에, 이저를 한양(漢陽) 사제(私第)에 내치도록 명하고, 리천우는 이미 파직하였으므로 다시 묻지 말게 하였다.
정종대왕 - 개혁입법정책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개혁입법정책
정종은 그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결코 왕위에 오르겠다는 욕심이 없었다. 다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의 위치가 그렇게 정해졌을 따름이다. 따라서 일찍부터 세자로 책봉되어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이상 실질적인 왕의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이렇게 미묘한 위치에 놓여있 던 정종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정권의 운영을 구상했을까?
실권을 갖지 않은 군주로서 이해되어 왔지만 왕권의 위상을 갖고 있는 정종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종은 비록 실세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그 동안 내분으로 갈라지게 된 형제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형제애를 회복한다\' 함은 곧 왕실세력의 재결집을 의미하며, 나아가서는 국정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기초였다. 또한 개혁세력들이 추 구하고자 한 여러 정책사항들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이들의 내용은 그 대표적인 사항을 중심으로 해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의 역할은 어찌보면 태조와 태종을 연결하는 안전한 징검다리로서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한다.
정종은 그의 재위기간 중 경연을 통해 치도를 배워나가는 과정, 부왕이자 태상왕인 태조에 대한 예우의 문제, 용관의 척결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정종 원년 8월 3일에 정종이 분경(奔競)을 금하는 하교를 내리면서 말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그는 나름대로 당시의 정치와 사회의 안정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즉 당시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기회를 엿보면서 관직에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이 몰려다니면서 참소와 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리를 지어가면서 몰려다님으로써 큰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이것은 정종이 당시 정치상황 속에서 벌어지게 된 여러 문제의 근본적인 것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일차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으로 분경을 금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되고 사병의 혁파가 이루어진 시점에 가야 비로소 개국초의 혼란한 정치상 황은 이제 중앙정부의 주도로 움직여 나가게 되는 것이다.
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벼슬을 얻기 위하여 집정자의 집에 분주하게 드나들며 엽관운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법으로 이를 금지한 적이 없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행정과 군정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 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이렇게 제정되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일족 중 3, 4촌내의 근친이나 각 절제사의 대소군관을 제외한 일체의 대소관리가 서로 사알(私謁)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분경 금지대상이 확정되는 것은 성종대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점을 볼 때 당시로선 규제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점차적으로 왕자로서의 수업을 경연을 통해 습득해 나가면서 정국운영을 주도 하였던 정종의 의도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또 다시 무너지게 된다. 그것은 또한 정국운영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다시금 정종에게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의 한계였던 셈이다. 어찌보면 이 시기를 기점으로하여 어떻든간에 왕권을 확립하고 이를 스스로 실현하고자 했던 노력이 무너지고 동생 즉 태종의 본격적인 정계복귀가 시작됨에 따라 정안군은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침내 정안군이 표면에 나섬으로써 왕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한 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정종은 정치다툼 속에서 권력의 기반을 장악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혹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제는 물러설 때가 된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정종대왕 - 개혁입법정책 (2)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그리고 정종 2년 4월 6일에는 그 동안 있어왔던 관제를 다시 정하여 체계를 잡았다. 그것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관제(官制)를 다시 정하게 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고쳐 의정부(議政府)로 하고, 중추원(中樞院)을 고쳐 삼군부(三軍府)로 하여, 직임이 삼군(三軍)을 맡은 자(者)는 삼군에만 전적으로 나가게 하고, 의정부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고, 좌복야(左僕射) · 우복야(右僕射)를 고쳐 좌사(左使) · 우사(右使)로 하고, 다시 예문관(藝文官)의 태학사(太學士) 1원(員) · 학사(學士) 2원(員)을 두고, 중추원 승지(中樞院承旨)를 고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 하고, 도평의사사 녹사(都評議使司錄事)를 고쳐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로 하고, 중추원 당후(中樞院堂後)를 승정원 당후(承政院堂後)로 하였다. 조준(趙浚)으로 평양백(平壤伯)을 삼고, 이화(李和)로 영삼사사(領三司事)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를 삼고, 이거이(李居易)로 판문하부(判門下府) 의정부사(議政府事)를 삼고, 성석린(成石璘)으로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를 삼고, 민제(閔霽)로 판의정부사를 삼고, 성석린의 공신호를 고쳐 동덕 찬화(同德贊化)라 하고, 민제를 동덕 좌명(同德佐命)이라 하고, 아울러 녹군국중사(錄軍國重事)를 가(加)하고, 정탁(鄭擢)으로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를 삼고, 도총제(都摠制) 이하는 의정부사(議政府事)를 겸하지 못하게 하고, 정구(鄭矩)를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한편으로 정종은 고신(告身)과 서경(署經)의 제도를 확립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것은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정종 2년 1월에 두차례의 논의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관료임명이 체계화되고 그 책임소재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초기의 정치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정종은 2년 정월 20일 당시만 해도 각 품의 고신을 대성(台省)에서 서경하기를 청하는 문하부의 건의를 윤허하지 않고 있었다. 대성에서 서경하도록 하는 것은 염치를 권하고 사풍(士風)을 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정종 주위에 있는 인물들로 무사층이 더 많았 기 때문은 아닐까? 이렇게 하면 자신이 임명만 하면 되던 것이 이제는 대성의 서경이 필요하게 된다는 점에서 자신의 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였을까? 당시의 의논을 보면, 4품 이상의 관원이 왕으로부터 직접관교를 받으므로 공론이 미치지 못하여 직사에 태만하게 된다는 점, 직질이 4품만 지나면 곧 관교를 받아 수령으로 나아가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공상(工商) · 천예(賤隸)도 함부로 외람되게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뜻이 있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점, 마지막으로는 관직에 있는 자로 하여금 공론을 따라 근신하게 하고 불의를 미연에 금지해야 한다는 점 등을 들으면서 대성으로 하여금 4품 이상의 고신을 서출(署出)하게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 동안 작위적으로 무질서하게 주어지는 관교와 공상, 천인들의 관직 진출로 인한 혼란, 그리고 이로 인해 염치와 사풍이 수그러들게 되었음은 당시의 정치상황이 그만큼 혼란하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공론을 따라 스스로 근신하게 만드는 대성의 서경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정종대왕 - 개혁입법정책 (3)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더욱이 이에 대해 사헌부에서도 같은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고 있어 정종은 다시금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인이 모두 그러해야 한다고 말할 땐 그만한 이유와 타당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종 스스로도 기왕의 제도에 문제가 있던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관리임용에 있어서의 무질서와 혼란이 이제는 가닥이 잡혀 체계화되고 어찌보면 대간으로 대표되는 신권(臣權)이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도 되리라 여겨진다. 왕권의 전제적인 운영에 제동을 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정종의 재위기간 중 이루어진 몇가지의 업적을 들어 정종의 정치적 입장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외에도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과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의 운영 등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다만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평생을 태종과 우애롭게 지냈으니 어떤 왕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파란만장했던 개국초의 난국을 헤쳐나와 왕위에 오르고 또 그 왕위에 집착하지 않고 곤룡포를 벗을 수 있었던 그의 마음은 오히려 평안했으리라 생각된다. 왕실법도를 지키고 신하들과의 논쟁, 수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되고 또 권력다툼의 가운데에서 이들을 조 정해야 했을 것이니 아마도 그 자신의 호방한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지긋지긋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격구를 좋아하고 말타고 활을 쏘며 산야를 달리기를 좋아하던 무인의 피가 흐르는 그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정종의 생애와 업적은 바로 고려말과 조선초의 혼란한 상황이 낳은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속에서 정종이 차지하는 부분인 것이다
태종대왕 - 생애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생애
난세에는 영웅이 있고, 그 영웅은 대개 남과 다른 생애를 살아간다. 또한 그가 태어나는 때에는 보통 용(龍)과 관련된 태몽이 있거나 이와 비슷한 기이한 태몽이 있게 된다. 그것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든 아니든 간에 하여튼 영웅은 잉태되면서부터 남다르다.
태종대왕(이하 태종이라 함)의 삶은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의 생애이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조선이 건국되었고, 그가 왕위에 오름으로 해서 조선왕조 5백년의 기반이 다져졌다. 그리고는 왕위를 셋째 아들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선위하면서 더욱 그 틀을 공고히 하였다. 어느 누구라도 이러한 업적을 남긴 태종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의 56 년간의 생애는 이 점에서 충분한 역사적 조명을 받을 만하다.
태종 공정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의 휘(諱)는 방원(芳遠)이요, 자(字)는 유덕(遺德)이다. 태종은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사이에서 6남 2녀 중 다섯 째로 역사를 뒤바꿀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당당한 무인의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으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무력기반을 이미 갖추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역 사의 시간은 일단 아버지 태조를 중심으로, 그 흐름의 중심부에는 태종의 힘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그가 주인공으로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무인이었던 태조가 물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이 신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대륙에서는 세계 대제국으로서 그 위세를 떨치던 원(元)나라가 주원장이 이끄는 명(明)에 의해 패퇴에 패퇴를 거듭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곧 공민왕의 실정과 죽음, 고려왕실의 정통성 시비,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그리고 권세가들의 극심한 농민 침탈 등으로 인해 고려 4백년의 역사는 이제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1367년(고려 공민왕 16) 정미년 5월 16일 신묘에 함흥부(咸興府) 귀주(歸州)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아들이 태어나면 점쟁이를 통해 아이의 운명을 알아보는 것이 일반적인 습속이었다. 당시 함흥부에서 유력한 집안의 안주인이었던 한씨(韓氏)는 인근에서 점을 잘 치기로 이름난 점쟁이를 찾아가서 태종의 사주를 내밀었다. 이 때 사주를 본 사람은 문성윤(文成允)이란 이름을 가진 이였는데 갑자기 그 사주를 보더니 모양새를 갖추고 한씨에게 공손하게 대답하기를,
“이 사주(四柱)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卜人]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
라고 하였다. 한편 남은(南誾)은 태종(太宗)을 보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영기(英氣)이다.”
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무인의 피를 타고 태어난 관계로 균형잡힌 몸과 강인한 체력, 그리고 그의 얼굴생김새와 군더더기 없는 그의 명확한 말솜씨와 문장실력,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그만의 흡인력을 두고 한 말이었다.
태종의 용모는 아버지 태조의 얼굴을 닮았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다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남들이 보기에 꼭 닮았다고 할 정도로 비슷했던 모양이다. 태조는 높은 코[隆準]에 용의 얼굴[龍顔], 그리고 뛰어난 풍채와 무인 특유의 의리와 결단력을 가진 제왕의 상이었는데 태종의 용모는 바로 이를 닮았던 것이다.
태종대왕 - 생애 (2)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이렇듯 태종은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였고, 조금 자라매 영명(英明)·예지(睿知)가 출중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되었다. 무인인 관계로 출정이 많아 자주 집을 비우게 된 태조의 부정보다는 아마도 어머니 한씨의 자상한 보살핌 속에서 무인의 길보다는 학문의 길로 나아가 무가(武家)에서 문명을 일으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인 태조는 비록 무인이었지만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하여 나름대로 병사들과 함께 경서(經書)를 읽기도 하였다. 또한 문관들과도 친분을 두터이하여 사귐에 진심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가문에서 유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없음을 불만스럽게 여기고는 어려서부터 문재를 보인 아들 방원으로 하여금 스승에게 나가서 유학을 배우게하여 당신의 모 자람을 메꾸고자 하였다.
태종은 이러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날마다 부지런히 글읽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이렇게하여 날마다 학문의 성취가 진일보하게 되자 태조는 일찍이 아들 방원을 돌아보며 말하길,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
라고 칭찬하였다. 전장에서 일생을 마쳐야 하는 무인의 삶 속에서 이렇듯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학문에 정진하였으니 그의 기쁨이 어떠하였겠는가? 태종은 1382년, 나이 열여섯의 동안(童顔) 소년으로서 고려(高麗) 진사시(進士試)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병과(丙科)에 제7등으로 급제(及第)하였다. 아버지 태조의 기쁨은 방이 붙던 날 대궐 뜰에 절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후광도 아니고 스스로 학문을 닦아 성취한 것이었다. 무인 집안에서 이렇듯 문인이 나왔으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태종은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민제(閔霽)의 둘째 딸 숙(肅)과 혼인을 맺었는데 당시 그녀는 그보다 나이가 두 살 위였다. 이 때의 결혼풍습으로 신랑보다 보통 신부의 나이가 많은 것이 상례였다.
그녀는 사대부의 여식으로서는 드물게 사리에 밝으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대개 이러한 여인은 난세를 살아가면서 자기가 해야할 역할을 잘 안다. 남편의 일을 내조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을 스스로 발휘하는 것이다. 후일 태종이 정도전과 싸움에 패하게 되면 스스로 따라 죽겠다고 집을 나설 정도였다.
민제는 온화한 인품을 가지고 있고 학문적 수양이 깊었던 만큼 태종은 그를 선달(先達)이라 부르며 지극하게 섬겼다. 단적인 예로는 그 자식들이 잘못하여 귀양갔을 때 민제가 병이 심하자 그들에게 병간호를 허락할 정도였다.
태종은 장인 민제를 통해서 정치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하륜(河崙)을 만나게 된다.
하륜은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와는 동지(同志)였다. 또한 민제는 태종의 장인이며 학문의 스승이기도 하다. 하륜은 민제의 집을 드나들면서 태종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는데, 이 때 하륜은 그가 범인과 다른 기운이 있음을 느끼고 민제에게 소개를 청하게 된다. 하륜은 본래 다른 사람의 상보기를 좋아하여, 민제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상 본 것이 많았지만 공(公)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었소. 내가 뵙고자 하니 공은 그 뜻을 말하여 주시오.”
라고 하였다. 민제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하륜이 군(君)을 보고자 한다.”
고 하므로 태종이 만나보니, 하륜이 나이를 넘어 태종을 진실된 주군으로 섬기고자 하면서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후일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된 인물들의 극적인 만남이었다.
태종대왕 - 생애 (3)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세상의 인심과 역사의 흐름이 더 이상 고려의 왕씨에게 있지 않음을 태종은 이미 젊어서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태종은 개연히 세상을 구제할 뜻을 품고, 능히 몸을 굽히어[折節] 선비들을 겸손히 대함으로써 내외의 인망을 얻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이들은 당시의 부패한 정치에 이를 개혁할 것을 부르짖던 젊은 선비들이었다. 이렇게 하여 태종은 이들을 자기의 주변사람으로 만들고 그들의 일상생활을 돌보아주는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태종의 나이 22살이 되던 해, 이제는 대륙의 명실상부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던 명은 고려에 여러 가지 부당한 요구와 압력을 가하면서 철령(鐵嶺) 이북의 땅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알려왔다. 이에 크게 반발한 최영은 강경 대응책으로써 요동을 공격하자는 주장을 펴면서, 태조의 `공료사불가론(攻遼四不可論)\'을 내세우며 반대를 무시하고 요 동공격을 감행하였다. 1388년 5월 22일 역사의 큰 전환점으로서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획기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위화도회군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최영은 우왕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와 정국 수습하고자 하였다.
당시 정5품의 벼슬인 전리 정랑(典理正郞)으로서 개경에 있던 태종은 최영에 의해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박한 상황을 예감하고 태종은 이에 퇴궐하여 집으로 가지 않고 포천(抱川) 재벽동(滓쮱洞)의 전장과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에 각각 있던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에게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이미 집안일을 맡아보던 노복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없었다. 할 수 없이 태종은 두 어머니와 당시 어린 나이였던 경신공주(慶愼公主) · 경선공주(慶善公主) · 무안군(撫安君) · 의안군(宜安君)을 모두 데리고 가문의 기반이 있는 동북면의 함흥부를 향하여 떠났다.
야음을 타고 길을 재촉하면서 야숙을 하거나 대강의 음식만 챙겨 먹을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두 어머니와 어린 아우들을 극진하게 보살폈다. 이천(伊川)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곳은 어머니의 가계가 연결되고 또 이씨집안의 지역기반이 있는 함흥부와 가까워 안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네 장정 백여명을 모아 인근을 잘 감시하여 만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십여일이 지나자 사람이 와서 개경의 일이 안정되고 최영이 고봉현으로 귀양가게 되었음을 알렸다. 수배가 풀린 것이다.
태종이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잘 극복하고 또한 가족을 잘 보살피자 태조(太祖)는 그를 여러 아들보다 다르게 대하였다. 또한 신덕왕후도 태종에 대해서는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였으며 `왜 내가 이런 아들을 낳지 못하였는가\'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태종은 더욱 효성을 다하였다.
1388년 5월 22일은 앞서도 말했듯이 역사의 전환점이 된 위화도 회군이 결행된 날이다. 이후 우왕(禑王)이 폐하여지고 창왕(昌王)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제 명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시중 이색(李穡)과 첨서밀직사사 이숭인(李崇仁)이 명나라의 서울인 남경(南京)에 가서 신정을 하례하고 그 동안의 일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이색은 자기가 없을 동안 국내에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아들을 볼모로 하여 데려가게 해 줄 것을 태조에게 청하였을 때 태조는 다섯 째 아들 태종의 지혜로움을 믿고 그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게 한다. 서장관은 다른 나라로 가는 사신들 가운데서 일체의 문서기록 및 그 처리에 관한 일을 맡은 벼슬을 말하며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의 다음 자리이다. 당시 22살의 약관을 갓넘긴 태종은 고려정계의 최고 원로로 정사(正使) 이색과 부사 (副使)인 이숭인의 다음인 서장관이 된 것이다.
태종대왕 - 생애 (4)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61세의 대정치가요, 문장가인 이색과 22세의 혈기왕성한 차세대의 대들보인 태종의 동행은 어쩌면 기울어져가는 고려를 끈덕지게 바로 세우려는 구세대와 이제는 새로운 세상을 펴야한다는 개혁을 부르짖는 신세대와의 만남을 의미하는 듯 싶다.
이색은 나름대로의 계산을 하고 태종을 데리고 갔으나 태종은 당시의 국제정세와 변화, 그리고 중국의 문물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오히려 더욱 분발하는 기회로 여겼다. 또한 가는 동안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제 관직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은 깨닫는 것이 많았다.
태종은 여러 차례 관직이 승진되어 1390년에는 불과 24살의 나이로 공양왕에 의해 정3품의 벼슬인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의 지위에 올라 왕의 관교(官敎)를 받게 된다. 24살의 나이로 정승의 반열인 정3품의 벼슬에 올랐으니 그 위세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태조는 이에 너무 기쁜 나머지 사람을 시켜 몇번씩이나 이 관교를 읽게 할 정도였다. 이 것이 의미하는 바는, 앞으로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태종의 앞길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앞으로 그의 정치생애는 탄탄대로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버지 태조는 최고의 지위인 문하시중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정치의 역학관계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다.
태조는 이 때 병을 앓고 있었고 더구나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다른 이들을 죄주기를 청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자 전문(箋文)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고는 궐에 나가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공양왕은 당시 우대언으로 그의 측근에 있던 태종으로 하여금 태조에게 관직에 나와 일을 보도록 개유하였지만 태조는 끝내 정사를 보지 아니하였다. 그리고는 집안 사람 들로 하여금 행장을 꾸리고 떠날 채비를 갖추게 하였다. 이 때 정도전과 남은 등이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들어 이 일을 막았다.
1391년 태종의 나이 25살에 그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해 주던 어머니 신의왕후가 9월 22일 갑작스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된다. 부부간의 금슬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출정하여 집을 자주 비우게 되었을 때 그녀는 집안의 대소사를 원만히 해결하였다. 또한 자식들이 성장하여 아버지를 따라 무인으로서 같이 출정하였을 때는 자식들과 남편에 대한 염 려와 무사함을 기원하였던 내조의 근원이 승천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세상이 무너진 듯 하였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의 무덤을 풍덕군(?德郡) 북쪽의 밤나무골[栗村] 즉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上道面) 풍천리(楓川里)에 가꾸었다. 태종은 그 효성을 다하기 위해 후일에 제릉(齊陵)이 된 어머니의 무덤 곁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侍墓)하면서 생전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워하였다. 3년상(三年喪)을 마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는 매양 태조를 뵙기 위하여 서울에 들어오면 길 위에서 눈물이 비오듯 하여 끊이지 않고, 태조의 저사(邸舍)에 이르러 느끼는 바가 있으면 문득 통곡하니, 태조의 좌우가 감창(感愴)하여 마지않는 이가 없었고, 태조는 항상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1392년 3월 태조는 명나라에 가서 조현(朝見)하고 돌아오던 고려의 세자 석(奭)을 맞이하기 위해 황주(黃州)에 나아갔다. 그리고는 곧장 해주(海州)에 행차하여 사냥을 즐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말이 사냥을 하던 중 진창에 빠져 넘어지게 되고 태조는 몸을 상하게 되는 불상사를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