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대왕 - 생애(3)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그런데 정종의 경우 조선왕조의 개국논의가 한참 일어날 무렵 이 자리에 참여치 않아 태조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지만 그가 가졌던 마음은 고려에 대한 충성에서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썩어없어져 버릴 고려의 종묘사직이었지만 그는 그나마라도 유지하여야 하며, 또 고려를 다시금 일으켜 세워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니 백이(伯夷) · 태백(太伯)에 비하여 부끄러울 바는 없었다. 좀더 그가 천하를 다스릴 마음이 있었더라면 적극적인 활동을 했을 터이지만 출사한 이래로 30대 중반으로서 기득권 세력에 들어가 있는 입장에서 쉽게 그러한 `역성(易姓)\'의 논리를 긍정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형인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가 장인인 지윤의 죽음을 맞이한 뒤 정계에서 거의 은퇴하다시피하고 술로 지세우던 것에 비해서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마침내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 1392년(태조 원년) 8월 초 7일에 왕자제군(王子諸君)을 봉할 때 정종은 36살의 나이로 영안군(永安君)에 봉하여지고 당시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왕자제군의 책봉이 있은 뒤 세자책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당시에 의논이 처음에는 공로와 나이로 써 정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으로 세자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 때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이 태조의 뜻을 헤아려 의안군(宜安君) 방석(芳碩)을 세울 것을 청하였던 것이고,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 등도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뒷날 자신들은 물론이고 왕실의 일대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불씨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것이 태조 즉위년 8월 기사(20)일의 일이다.
그러나 왕자가 되었다고 해서 개국초의 혼란한 상황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래로는 왜구가 계속해서 침탈하고 있었고, 위로는 명으로부터의 압박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정종은 1393년(태조 2) 6월 초6일에 문화현(文化縣) · 영녕현(永寧縣)의 두 현에 출군하여 왜구를 물리쳐 공훈을 세우게 된다. 태조는 이 해 9월에 1391년(고려 공양왕 2)에 두었던 삼군도총제부(三軍都總制府)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하여 여기에 10위를 중 · 좌 · 우의 3군으로 나누고 각 군마다 종친 · 대신들을 절제사로 임명하였는데 정종은 이 때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에 임명된다. 또 무안군(撫安君) 방번(芳蕃)은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가 되었으며,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는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가 되었다. 이로써 정종은 병권에 관여케 되었고 요동 공격을 위한 훈련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는 정도전, 남은, 성석용(成石瑢) 등이 국내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명으로부터의 압력을 물리치기 위해 요동을 정벌할 것을 청한 데에서 나온 조치였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에는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 방우의 죽음이 있었다. 그의 엉뚱한 죽음은 소주(燒酒)를 과하게 마셔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그 원인은 장자로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가 가장 컸을 것이고 그의 장인 지윤이 죽음을 당함으로써 얻은 심화(心火)가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태조가 후계선정을 할 때 공로나 순서에 의해 정하지 않고 신덕왕후의 의중에 따라 막내인 서제(庶弟) 의안군을 세자로 정했다는 점 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정종대왕 - 생애(4)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같은해 6월에는 왕실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는데, 그 정확한 연유는 전해지지 않지만 태조가 내시 이만(李萬)을 목 베고, 세자(世子)의 현빈(賢嬪) 류씨(柳氏)를 내쫓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현빈 류씨와 내시 이만이 실행(失行)을 했으리라는 정도이고, 정확한 연유에 대해 태조는 왕실의 일이니 함부로 논하지 말 것을 명하여 함구토록 하였다. 그리고 세자빈은 이듬해인 3년 10월 임오(16)일에 다시 이조전서(吏曹典書) 심효생(沈孝生)의 딸로 정하게 된다.
그 후 왕실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였고, 문제라면 아직 조선을 인정치 않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이도 세월이 좀더 지나면 해결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제도와 문물 등도 점차 구색을 갖춰 갔지만 무엇인가 미진한 부분이 계속해서 왕실을 흔들곤 하였는데, 아직 체제를 갖추지 못한 왕실과 정도전이나 남은 등과 같은 공신세력, 그리고 명에 대한 대응문제, 세자책봉이 과연 잘 되었는가 하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이러한 문제들 의 핵심 열쇠는 바로 신덕왕후 강씨가 쥐고 있었던 것이고, 태조의 의향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396년(태조 5) 한양으로 서울을 옮긴 지 2년이 되어가면서 도성의 구획이나 모습 등이 점차 모양을 갖춰갔다. 이 해 1월에는 경상도 · 전라도 · 강원도 · 서북면 · 동북면의 민정 11만 8,070명을 징발하여 도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고, 4월에는 한성부의 5부 52방에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되었다. 이 때 뜻하지 않게도 현비(顯妃) 강씨는 건강이 좋지 못하였고 요양을 위해 이어소(移御所)로서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 있었 는데 8월에 접어들면서 매우 위독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무술(13)일 밤에 현비는 이득분의 집에서 승하하게 된다. 전환시대의 주역으로서 태조를 내조했던 그녀의 죽음은 왕실뿐만 아니라 조정의 권력관계를 바꾸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급작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정안군(방원)은 크게 정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또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으면서 자숙하였다. 그런데 태조 6년이 되면서 국내의 사정은 전시체제로 바뀌어 군사훈련을 독려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 해 6월 정도전(鄭道傳) · 남은(南誾) 등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군사훈련은 명과의 외교적 분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고, 국내의 사정도 개국한 지 얼마되지도 않아 이는 사회 안정과는 거리가 있는 상태였다. 더불어 정도전이나 남은 등의 공신세력이 이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이들 특히 왕실세력들에게는 불만이었다. 훈련이 한창 진행되던 8월 초에 이르러 훈련을 독려할 것을 청한 대사헌 성석용(成石瑢)의 상언은 오히려 공신세력과 왕실세력과의 충돌을 빚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태조는 절제사로 개국공신인 남은 · 이지란(李之蘭) · 장사길(張思吉) 등과 영안군 · 무안군 · 정안군 등의 왕실지친 그리고 류만수(柳曼殊) · 정신의(鄭臣義)에게 원종공신 등이 진도를 익히기를 게을리하고 익히지 않는 까닭을 문책하게 하였다. 정도전 등과 특히 영안군과 정안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세력은 그 알력이 심해졌는데, 결정적 인 것은 그 동안 조선의 움직임을 주시해 온 명이 정도전을 중국으로 보낼 것을 원한데 대해 정도전은 고창증(鼓脹症)이 있다 하여 계속 거부했고, 영안군은 태조에게 사정이 급박하니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정도전 등은 영안군 등의 왕실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정종대왕 - 생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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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도전 등이 이렇게까지 한 데에는 태조의 후사로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의안대군 방석이 1397년(태조 6) 당시 나이가 16살로 이제는 장성한 때였고, 태조는 이미 63세에 이르는 노년의 나이였던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후면 태조가 세자인 방석에게 전위를 할 것이라는 점이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또한 의흥삼군부의 설립을 통한 병권의 집중 및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정도전은 자신의 입지에 자신하였다. 또한 왕자들 및 공신세력 등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을 혁파하고 이들을 국가의 군체제로 흡수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자 방석도 모후인 신덕왕후가 승하한 뒤 그의 장인 심효생(沈孝生)과 정도전 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1398년(태조 7) 무인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태조가 병석에 눕게 되자 이를 계기로 양측은 마침내 피할수 없는 상황에서 충돌하였다. 바로 역사 속에서 일컬어지는 `제1차 왕자의 난\' 혹은 `무인정사(戊寅靖社)\'가 바로 그것이다.
정안군 즉 태종은 이 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그 동안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더불어 세자 방석과 무안군 방번은 외방으로 안치되었다가 이거이(李居易)와 회안군 방간(芳幹)이 보낸 이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무인정사의 가장 큰 배경은 역시 세자책립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칫 방석이 왕위에 오를 경우 그야말로 정계은퇴 정도가 아닌 죽음을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판단은 혈육을 참상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이 때 영안군(정종)은 태조의 건강을 위해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를 드리고 있었다.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몰래 종 하나를 거느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나와 걸어서 풍양(豊壤)에 이르러 김인귀(金仁貴)의 집에 숨었다.
난이 진정된 후 영안군은 사람들이 그를 찾자 해가 저물어 어둑할 무렵에야 궁성 남문밖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정안군은 영안군을 맞아 세자로 추대하려는 결심이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정안군이 영안군을 찾은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 번째는 무인정사에 그가 참여치 않았다는 점으로 태조로부터 크게 질책을 받을 염려가 없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혈통상 맏형인 진안대군이 이미 별세하였기 때문에 영안군이 장자의 역할을 하고 있어 당연히 순서상 그에게로 돌려야 한다는 점, 세 번째는 아직까지 자신의 세력이 굳건하지 않다는 점 등이 있어 그를 세자로 추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안군은 역시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당초부터 의리를 수립하여 나라를 세워서 오늘날의 일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이것이 정안군의 공로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
사실 영안군이나 정안군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점은 정도전 등에 의해 예견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관직이나 중요한 일들을 점복으로 예측하는 일들이 성행하였는데, 이때 정도전 등도 이를 행하였다. 즉, 복자(卜者)인 안식(安植)이 말하길,
“세자의 배다른 형들 가운데 왕이 될 사주를 타고난 이가 하나만이 아니다.”
라고 말하자 정도전은
“곧 그들을 제거할 것인즉 어찌 근심하리요.”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었던 것이다.
정안군은 이에 대해,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적장자에게 있어야 할 것 입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안군은 결국,
“적자(嫡子)를 세자로 세우면서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인데, 전하께서 장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웠으며, 정도전 등이 세자를 감싸고서 여러 왕자들을 해치고자 하여 화가 불측한 처지에 있었으나, 다행히 천지와 종사의 신령에 힘입게 되어 난신(亂臣)이 형벌에 복종하고 참형을 당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적장자인 영안군을 세워 세자로 삼게 하소서.”
라는 신료들의 청에 의해 세자의 위에 오르게 된다. 전에 정도전이 복 자에게 물어 점을 친 것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으니 천명이란 역시 정해진 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라 하겠다. 이 때가 영안군의 나이 42세이고, 정안군의 나이 32세였다.
정종대왕 - 생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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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참상이 자신의 목전에서 벌어진데 대해 태조로서는 차마 안녕하기가 힘들었고, 건강도 좋지 않아 더 이상 국정을 돌본다는 것도 어려웠다.
9월에 들면서 태조는 이러한 점을 더욱 몸으로 느끼면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도 자신이 상왕으로서 건재해 있으면서 왕위를 물려준다면 개국초의 혼란함이나 또 사왕(嗣王)인 정종이 정국을 조정해 나아가기가 편하리라는 것이었다. 또 무인정사의 발발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그 자신이 분명하게 인식하기도 했던 것이다. 태조는 무인의 기질을 갖고 있어 한 번 결심하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그는 왕위의 선위를 곧바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이달 초5일에 태조는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왕위를 세자에게 전해주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자 한다고 말하고는 이와 관련한 교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정종의 이와 같은 즉위과정을 보면, 태조의 양위는 자의에 의하였다기보다는 타의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충분히 제기된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하였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의하여 전개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종은 1398년 9월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선위(禪位)를 받고 또한 형제간의 우애를 두터이하였으며 재위 2년 후 11월에 왕위를 태종에게 선위한 후 20년간의 여생을 한가롭게 지냈다. 한편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으로 골육간의 싸움이 무너지자, 형제애 가 벌어지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다음의 내용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1400년(정종 2) 2월에 2차 왕자의 난으로 삼성(三省)에서 동모제인 방간을 국문하고 죄를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종은 통곡하여 울면서 선지(宣旨)하길,
“어제 삼성(三省)에서 올린 소가 비록 법에 합하나 내가 어찌 차마 골육지친을 형륙에 처하겠는가? 지금 들으니, 삼성이 함께 모였다 하니 이 일을 다시 청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연에 금지하니 모두 그리 알라.”
고 하면서 방간의 죄를 용서해 주고자 하였다. 이는 왕권을 도모하여 사사로이 병사를 움직인 대역죄에 대해 반드시 처벌할 것을 주장한 대신들 의 의견에 대해 동모제의 사면을 형친의 정으로써 설득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역량과 공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정종은 자신의 재위기간 중의 정사가 대부분 아우 정안공에게서 나오는데 대해서 이를 힘으로 대결하고자 하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정종은 또다시 후계자의 선정문제로 위태로움을 당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정안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이 없 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정종은 모든 왕자를 절로 보내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 정치세력간의 충돌로 인한 혼란 상황을 극복하게 한 슬기로운 조치였다. 그 자신이 태조에게서 선양을 받았고 선왕이 살아있는 시점에서 권력의 안정을 추구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정종의 경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을 때 국왕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십분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그러하지 않 은 것이다. 물론 이에는 정안공의 정치세력이 워낙 두터운 관계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는 점에도 그 배경은 있다.
정종대왕 - 생애(7)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정종은 재위기간 중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경연에서 불교와 도교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는 스스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제왕학으로서의 왕도의 방향과는 거리가 있는 형태인 것이다. 당시는 성리학을 국교로 삼으면서 정치질서의 기본이념틀로 이를 구체적으로 추진하던 시기였다. 정종의 이러한 태도는 훗날 낙천(樂天)의 나날을 보내는데 무욕(無慾)이 작용했음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재위 기간 중에도 격구를 상당히 즐기고 있었다. 격구는 말을 타고 공채로 공을 치는 경기인데 옛날 무관들과 민간에서 하던 무예의 한가지로, 말을 탄 채 숟가락처럼 생긴 막대기로 공을 쳐서 상대방 문에 쳐넣는 놀이이다. 민간에서는 이를 `공치기\' 또는 `장치기\'라고 하였으며, 중국에서는 `타구\'라고 불렀다. 세종은 이에 대해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 야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고까지 하였으며, 정기적인 군대 열병식에서는 반드시 이를 실시하는 한편 무과시험 과목에까지 포함시켰던 것이다. 정종은 본래 병이 있어서 잠저 때부터 밤이면 마음속으로 번민하여 자지 못하고, 새벽에야 잠이 들어 항상 늦게 일어났었는데, 격구를 하면서 기운과 몸을 길렀다고 술회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실제로 정종 자신은 왕위에 대해 욕심이 없었고 동모제인 정안공을 제왕지목(帝王之木)으로 여겨 제2차 왕자의 난 후 곧바로 그를 세자로 삼고 양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정안왕후는 매양 태종이 들어가 뵐 때에 정종에게 아뢰길,
“전하께서는 그 눈을 어찌 못보십니까. 속히 왕위를 전하시어, 마음을 편하게 하시오”
하였더니 정종이 그 말을 따라 상왕으로서 별궁에 거처하였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정종 스스로 표현하고 있듯이 그는 자신의 정치적 한계성을 절감하고, 선위를 통해 왕위계승의 안정을 도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보전하고자 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내가 어려서부터 말 달리고 활 잡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 데, 즉위한 이래로 왕의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이르니, 내가 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나 어찌할 수 없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고, 크게 공덕이 있으니, 마땅히 나를 대신하도록 하라.”
고 세자에게 전지(傳旨)하고는 송경(松京)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곧바로 선위를 하였던 것이다. 이 때가 정종의 나이 44세였고 태종의 나이 34세였다.
어찌보면 정종의 이러한 결단이야말로 정치혁명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앞서 밝힌바대로 자신이 갖는 권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는 점이 작용하였지만, 대개의 경우 왕위를 물려준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왕권과 그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신료들이 왕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반대하 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건강이 좋지 않더라도 왕위의 선양만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론이었던 것이다.
정종대왕 - 생애(8)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준 후 정종은 상왕으로서 별궁에 거처하면서 그 동안 중이 되게 했던 모든 왕자를 환속케 하였다. 또 한편으로 태종은 상왕을 뵐 때 항상 신(臣)이라 칭하고 우애에 극진하였던 것이다. 이는 개국초라는 상황 속에서 불필요한 왕위계승 싸움을 없애고 정치안정을 위해 왕위를 태종에게 선위함으로써 조선초의 정치적 혼란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 정종과 태종의 화기애애한 상황은 사냥을 같이 하거나 주연을 베풀거나 하면서 우애를 다져나갔고, 태종이 다시 그 아들 세종에게 양위를 한 뒤에는 정종과 태종 그리고 세종이 한 자리에 모여 술자리에서 즐거이 하며 우애와 효를 다하였던 것이다. 태조와 정종, 태종의 관계는 왕위 계승 상에 있어 무리가 따랐기 때문에 자리를 같이 하더라도 부드럽지가 못했지만 정종과 태종 그리고 세종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조선 왕실사 에서 이러한 관계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은 어쩌면 왕실과 왕권이 갖는 한계를 느끼게도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정종의 만년은 산천을 유유자적하면서 `낙천지명(樂天之命)\'을 그대로 생활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자식들도 많아져 적처인 정안왕후 김씨로부터 얻지 못한 자식복을 누릴 수 있었다. 때로는 인덕궁(仁德宮)에서 거하고, 때로는 광진원(廣津院) 산기슭에 임시로 장전(帳殿)을 마련하여 거처하면서 그는 만족하였고, 이렇게 상왕으로서 한가하게 수양하고 살기를 열아홉해 동안을 하였다.
1408년(태종 8)에 있은 태조의 승하와 1412년(태종 12)에 있은 정안왕후 김씨의 죽음은 그에게 심적인 아픔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천수를 누렸다. 태조는 74세, 정안왕후는 58세로 비교적 안락한 삶을 누렸던 것이라 하겠다. 정종은 환갑을 넘으면서 건강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꼈고, 죽음을 준비할 필요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그는 1419년(세종 원년) 8월 12일에 병으로 서강(西江)에 사는 전 사직(司直) 박인(朴因)의 집에서 피접하다가 20일에 병세가 위중해져서 인덕궁(仁德宮)으로 돌아와 26일에 정침(正寢)에서 6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정종은 자신과 평생을 같이한 정안왕후 김씨를 죽어서 다시 찾게 되었는데 풍덕(?德) 동편 흥교동(興敎洞)에 능을 같이 하였던 것이다. 능호는 후릉(厚陵)이라 하였고, 묘호는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에 이르러서 비로소 정종(定宗)이라 하게 된다.
정종대왕 - 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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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
정종 치세는 비록 즉위년부터라고 하여도 3년에 불과한 짧은 것이었지만 실제 그의 재위기간 동안은 조선왕조 5백년의 초석이 다져지기 시작한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즉위교서에 나타난 개혁의지와 경연을 통한 신하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사병혁파와 분경금지, 삼군부의 축소 등을 통한 군권의 장악과 정치, 행정제도의 개혁 등이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짧은 기간에 많은 개혁작업을 일궈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기인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첫째는 아버지인 태조가 살아있음으로 해서 개국공신세력들의 이탈을 제어할 수 있었다는 점, 둘째는 개국초의 난세에 확고하게 군권을 장악하고 실제 많은 일을 해낸 정안군 즉 태종이 뒷받침하였던 점을 들 수 있겠고 마지막 세번째는 고려말의 개혁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이룩하고자 했던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종대왕 - 시대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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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혁작업 외에 정종의 큰 업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왕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태종에게 평화적으로 왕위를 이양함으로써 개국초의 혼란스러웠던 정국의 안정을 도모한 점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겠지만 정종은 왕위를 자신의 자식에게 주는 것이 아닌 왕조개창의 1등공신이자 당시 정권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던 그의 동생 정안군에게 왕위를 선위함으로써 여러차례의 왕자의 난 등에서 나타난 골육상쟁의 비극과 내분의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기왕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정종에 대한 평가에서는 대부분 그의 재위동기와 치세기간에 이루어진 일들이 동생 정안군에 의해 행해졌다고 보아 폄하하는 측면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 국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당시 수없이 벌어졌던 골육상쟁의 비극을 막으려 했던 점과 태조와의 관계개선,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적 능력과 외적인 정치 적 능력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있었기에 왕실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으로 당시의 상황에서 그만이 이를 행할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정안군 즉 태종 자신도 인정한 측면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정종의 정국운영을 중심으로 하여 정종이 어떻게 난국을 헤쳐나갔고, 여러 제도개혁을 실시하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정종대왕 - 즉위교서에 나타난 개혁정신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즉위교서에 나타난 개혁정신
1398년(태조 7) 9월 12일에 태조의 선양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 정종은 태묘에 고유하고, 정전에 앉아 즉위교서를 반포하였다. 그 중심내용은 왕위 등극의 정당성과 정교의 근본으로서의 백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를 위해 여러 제도의 개혁을 실시하고자 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종이 실시하고자 했던 개혁정책은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아야만 그의 의지를 알 수 있을성 싶다.
즉위교서의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말하노라. 삼가히 생각하건대 상왕께서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에 순응하여 비로소 국가를 세우고 강기(綱紀)를 베풀어 만세에 모범을 보였는데 불행히도 간신 정도전과 남은 등이 연줄을 타서 권세를 부리고 몰래 권력을 마음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워 후사로 삼고서 장유(長幼)의 차례를 빼앗고 우리 형제를 이간시켜 서로 선동하여 변고를 발생시켜서 화가 불측할 지경에 있었는데 다행히 천지(天地)와 종사(宗社) 의 신령이 몰래 도와주고 충신 의사들이 마음과 힘을 다함에 힘입어 간악한 무리들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고 나라의 운명이 편안하게 되었다. 삼가 상왕께서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으므로 내 소자(小子)가 몸이 적장의 지위에 있어 뒷일을 능히 부탁할만하다고 여겨 이에 왕위에 오르라고 명하셨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이므로 조심하고 두려 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사양할 수 없게 되어 홍무 31년 9월 초5일 정축에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에 오르고 10일 정해에 몸소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서 종묘에 제사지내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상왕께서 제왕의 정치에 염증이 나서 소자에게 맡겼으니, 원컨대 한 나라로써 영구히 봉양하겠으므로 각 관사의 공상과 여러 도의 진헌은 한결같이 상왕이 왕위에 계시던 날과 같이 할 것이다.”
정종대왕 - 즉위교서에 나타난 개혁정신 (2)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먼저 그는 제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르는 과정과 그 정당성 및 상왕인 태조에 대한 예우문제를 먼저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종 자신의 의지로 왕위에 오르기보다는 천지와 종사에 의해 즉 천명에 의한 타의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통하여 단지 관념적인 상투어가 아닌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정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즉 그의 생애를 보면 권력을 사랑하여,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고 행사하려는 욕심보다는 자연인으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다음으로 유신(維新)의 교화를 선포함으로써 백성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정치운영 전반에 대해 과감한 조치를 취하고자 했던 의지가 나타나 있기도 하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왕자의 난\'의 후유증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대사면령을 반포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큰 주제는 아마도 태조로부터 내선(內禪)을 받아 왕위에 즉위하면서 선언한 `편민사의(便民事宜)\' 30개조와 관련하여 조세개혁을 통한 백성의 사회 경제 적 안정과 군사력 강화, 그리고 법령의 준수, 성균관과 오부학당의 운영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근본은 민에게 있다는 생각과도 당연히 연결된다. 그리고 이 즉위교서 속에는 전통 왕조사회에서 왕위에 등극하는 여러 왕들의 교서에 대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내용들과 대동소이하지만 개국초의 정치상황을 잘 이해하고 고려말 어지러웠던 정치사회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끔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정종이 진실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가장 긴급하게 행하여야 할 사항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같다.
따라서 정종은 나름대로 당시의 상황에서 꼭 행하여야 할 사항과 이념적인 부분이 백성의 안정과 정치질서의 안정에 있음을 고려하였던 것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행하기 위해 위와 같은 교서를 반포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