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대왕 - 생애 (9)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그러나 이러한 종실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것은 1479년(성종 10) 6월 2일 당일에 폐비와 관련한 교서를 내리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왕실에서 정비가 투기로 인하여 폐비되는 일은 조선 왕실에 있어서 초유의 사건이었다. 앞서 왕비 책봉과 관련하여 내려진 교문과 비교할 때 정반대의 평가가 내려진 것이었다.
먼저 성종 개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12살이라는 나이차와 윤씨의 적극적인 애정욕 및 다른 비빈에 대한 투기, 성종의 활달함 등에 대한 그녀의 불만 등이 있었다. 왕실에 있어서도 그녀의 행실이 모후인 소혜왕후에게 알려지고 내궁 전체의 문제로 전개되면서 더 이상의 문제의 소지를 없애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기묘록(己卯錄)>에 실린 내용 중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이를 본 인수대비가 크게 노하여 임금을 격동시켜 외정(外廷)에 보였다는 기록이 이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운영에 있어서는 성종조의 유교 정치 문화의 근원은 바로 덕치와 인륜 강상의 수행이었고, 왕과 왕비는 그 정점에 서 있었다. 그런데 왕비의 투기는 바로 칠거지악 중 가장 큰 죄목에 속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밖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역시 가장 큰 배경은 성종의 개인적인 생각과 모후인 소혜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1482년(성종 13) 8월에 이루어진 윤씨의 사사는 그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폐비될 당시의 상황은 사실 정치적 성격이 짙었다기 보다는 생활의 부분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이 후 윤씨의 활동 내용은 정치적인 복위 노력의 성격이 매우 짙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이 바로 윤씨의 사사라는 비극을 낳게 하였다.
중궁의 자리는 이듬해 숙의 윤씨로 정해지게 되어 폐비된 윤씨를 대신하였다. 즉, 1480년(성종 11) 11월 8일에 새로이 왕비를 책봉하여 곤위(坤位)를 채웠는데 이 때 그녀의 나이 열 아홉이었다. 그녀는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평정공(平靖公) 윤호(尹壕)의 딸로 1473년(성종 4)에 뽑혀 궁에 들어와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가 제헌왕후 윤씨가 폐비되면서 그 이듬해인 11년에 왕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진성대군(晋城大君) 즉 중종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았는데 공주는 일찍 죽었으며, 연산군 때를 거치고 아들인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중종 25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윤씨는 별궁에 폐치된 뒤 다각도로 왕비의 지위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이고 또 원자인 연산군이 성장함에 따라 이를 배경으로 정치권과의 연결을 시도하였던 듯하다. 성종의 표현을 빌리면 “심지어는 일찍이 역대(歷代)의 모후(母后)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스스로 기뻐하고”라든가, “외부(外部)의 사람들이 원자(元子)가 점차 성장하는 것을 보고는 앞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이 사건을 말하는 이가 많다”라고 하여 윤씨가 자신의 행실에 대해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원한을 품고 보복을 할 기회를 찾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특히 윤씨에 대해 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이들은 매체를 완전 장악하여 결국 성종으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이고 비극적인 결단을 내리게 하였다. 바로 사사(賜死)였던 것이다. 1482년(성종 13) 8월 16일에 있었던 다음의 사실들은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종대왕 - 생애 (10)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성종은 이날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 · 육조(六曹) · 대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윤씨의 처리에 대한 논의를 하도록 하였다. 먼저 성종은,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만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
하였다. 정창손은 이에 대해 원자가 있기에 어렵다고 하였지만 사실 성종의 결심은 이미 굳어져 있었고, 대신들로 하여금 그 대책을 진술하도록 한 것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뒤이은 성종의 표현에는 이것이 나타나 있다. 즉,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왕실 최대의 비극이 마침내 1482년(성종 13)8월 16일에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483년(성종 14) 2월에 윤씨 소생인 원자 융(쌽)이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8세였다. 그 어머니를 사사하고 그 아들을 세자로 삼았으니 어찌보면 모순된 일이었다.
그리고 정해진 세자 수업의 과정을 밟도록 하였다. 연산군의 경우 그리 뛰어난 자질은 아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종은 윤씨와 관련한 일은 원자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였지만 그것은 사실 천륜을 끊는 일인지라 인력으로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러한 염려는 결국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현실화되어 사화(士禍) 및 정치적 보복이라는 참화를 불러일으켰다.
이 후 성종의 생애는 이를 둘러싼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이었고, 왕실 내에서 더 이상의 문제가 발생치 않아 윤씨 사건은 일단락지어지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유명으로써 윤씨에 관한 일은 100년간 논하지 말라고 하여 훗날 벌어질지도 모를 참화를 막고자 하였지만 결코 이루지 못했다.
세자 책봉이 이루어진 해인 1483년(성종 14)3월에 그 동안 병환을 앓고 있다가 병 치료차 온양에 가 있던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30일에 죽음을 맞이하여 왕실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의 나이 예순 여섯,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꿋꿋하게 살아온 여장부의 죽음이었다. 세조의 잠저 시절부터 그를 보필하였으며, 왕실에 들어와서는 기강을 바로잡았고, 재상들과 더불어 성종의 초기 집권을 도왔던 그녀는 조선시대 어느 왕비보다도 현숙하고 능력있는 분으로 평가받았으며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세조의 능인 광릉의 동편 언덕에 단아하게 이승의 흔적을 남겼다. 대왕대비의 죽음은 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조조에 요구되었던 정치사회 새로운 시대의 주인인 성종의 시대에 맞게 전환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성종대왕 - 생애 (11)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신숙주(1475) · 한명회(1487) · 최항 · 양성지 등의 죽음도 오랜 세월속에서 얻어진 결과였다. 다시 성종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친인의 죽음이 또 다가왔다. 바로 단 하나밖에 없는 형인 월산대군이 세상을 뜬 것이다. 1488년(성종 19) 12월 21일의 일로 그의 나이 35세였다. 군주의 친형답게 예를 차리고 겸손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면서도 검소하였다. 동생이 군주이면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 만큼은 모두 용서가 될 터인데도 그러한 일은 절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부인인 박씨로부터는 후사가 없었고 다만 측실로부터만 두 아들을 두었을 뿐이었다.
1488년(성종 19) 계비인 정현왕후로부터 아기씨의 탄생이 있었다. 정비로부터 얻은 두 번째의 자식인지라 성종은 매우 기뻤지만 또 그만큼의 부담도 있었다. 아무리 왕실의 예법 절차가 엄하다고는 하나 대군의 탄생은 그와 관련한 정치 세력의 형성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성종이 맡아야 할 부분이라기 보다는 연산군이 감당해야 할 짐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때 태어난 분이 연산군을 이어 보좌에 오르게 된 중종(中宗)이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지 벌써 25년째가 되면서 성종은 점차 병약해짐을 느끼게 되었다. 한때는 왕실생활을 벗어나 성밖으로 나아가 풍류를 즐기는 일도 있었지만 그도 이제는 점차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1494년(성종 25) 가을에 접어들면서 건강이 전과 같지 않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왕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와 세종조부터 그 학문을 떨치면서 세조를 도와 창업의 공을 이룩한 신숙주, 그 학문과 경륜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국가의 문명을 이룩한 양성지, 최항, 서거정, 강희맹, 손순효… 등과 그리고 조부 세조와 왕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던 조모 정희왕후, 언제나 왕에게 양보하면서도 밝음을 잃지 않은 형 월산대군, 일찍 돌아가셔서 그 기억은 희미하지만 왕을 돌보아주면서 아끼었을 덕종과 자애로움과 엄함으로 왕실의 살림을 돌본 어머니 소혜왕후 등 이들은 모두 생사를 떠나 다시금 가까이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부인들과 많은 자식들은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제왕으로서의 지위는 모든 것을 억제하면서도 건강함을 보여야 했다. 특히 세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 친모에 대한 생각을 하자면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왕은 평상시의 일과를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행하였다. 오히려 옆에서 쉴 것을 종용하였지만 무시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 12월 24일에 성종은 더욱 위독해졌다. 아무리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구중궁궐이라 하더라도 계절의 매서움은 벗어나지 못했다. 성종은 관복(冠服)을 갖추고 대신을 불러 보았다. 이튿날인 12월 24일에 정침(正寢)인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향년(享年)이 38세이고, 재위(在位)한 지 26년이었다.
성종의 치세는 유교정치의 극성기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태종과 세종과 함께 세조와 성종의 치세는 바로 창업과 수성의 관계로 비유된다. 또한 공통적으로 세종 이후의 정치적 혼란이나 성종 이후의 정치적 혼란은 매우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기도 하다. 성종의 치적은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그의 묘호가 `성종(成宗)\'으로 정해지고 존시(尊諡)가 `인문 헌무 흠성 공효 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 된 것은 결코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495년(연산군 원년) 4월 초 6일에 광주(廣州) 소재지 서쪽의 학당리(學堂里) 언덕에 모시고 이름을 선릉(宣陵)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선릉이 그 곳이며,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 함께 있다
성종대왕 - 시대상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시대상
군주 중심 체제의 올바른 확립을 위해 조선왕조 5백년사에 있어서 유교정치문화를 꽃피운 군주로서 많은 서적의 편찬과 활발한 학문 활동 및 정치적 안정 등을 일궈낸 임금을 꼽을 때 성종은 그 묘호 만큼이나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태종 · 세종 · 문종 · 세조 · 예종 · 성종조를 거치면서 조선 왕실은 국가 기반을 완전히 다졌다. 물론 이 기간이 평탄치만은 않았지만 비온 뒤에 땅은 더욱 굳어지는 법이다.
15세기 후반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성종은 비록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승하하였지만 25년간의 치세 기간은 매우 활발한 정치적 문화적 학문적 움직임을 보인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성종 때 등장하는 신진 사류로서의 김종직 등의 등장은 유학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에 있어서도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따라서 성종의 업적을 살펴보는데 있어 유교적인 군주상과 유신(儒臣)들의 활동 내용 및 사회 운영에 있어서의 유교문화의 정착 등을 중심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겠다. 그만큼 조선 전기에 있어서 나아가 조선 시기 전체에 있어서 성종이 차지하는 부분에 대한 평가는 조선 사회 전체상의 변화상을 이해하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성종대왕 - 유교윤리 확립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유교윤리 확립
조선 전기의 유교 문화는 사실 전시기인 고려의 문화를 잇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의 문화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보다 유교 이념에 접근하는 이론 및 실천적 접근을 보이고 있다. 그 싹은 태종조에 일어나기 시작하여 세종조에 왕성하게 꽃을 피웠다. 그러나 세종조의 유교 문화는 전시기의 것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사류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한 결과였다. 따라서 세종 후반기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던 이들은 덕치와 민본 그리고 도학(道學)이라는 학문적 흐름을 보다 분명하게 요구하는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단종과 세조조의 한 차례 시련을 겪으면서 그 흐름은 보다 명확하여졌고, 성종조의 정치적 안정은 이들을 표면화시키면서 2차 유교 문화의 극성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성종은 먼저 왕 스스로의 학문적인 능력을 극대화시켜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한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무리 훌륭한 신하들이 보필하고 있더라도 군주 자신이 우둔하고 아첨에 흔들리고, 간언에 귀기울이지 않고, 사치롭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왕세자로 책봉되어 체계적인 군주수업을 받지 않은 성종이 갑작스레 왕위계승자로 정해지면서 혹 우려되는 바가 컸지만 그의 그릇은 채워지지 않는 미완의 대기였다고 하겠다. 열 셋이라는 어린 나이는 아직 치기어린 시기이지만 반대로 아직 그려지지 않은 화폭이라고도 할 수 있다. 능력을 가진 화가가 그리느냐와 화폭의 질의 상관관계가 상승 작용을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정희왕후와 정인지 · 신숙주 · 최항 · 서거정 · 양성지 등의 대신들은 그들의 맡은 바 역할을 아주 충실히 이루어 냈다. 특히 경연(經筵)을 통한 학문 수업은 그 바탕이 되었다. 즉 성종은 조강(朝講) · 주강(晝講) · 석강(夕講)의 하루 세 차례 경연과 이에 더하여 소대(召對)까지 시행함으로써 수학의 강도를 높였고, 그 결과 경연관이나 대신들이 논하던 강학(講學)에서 이제는 오히려 성종이 신하들을 지도하는 쪽으로 역전된 것이니 성종의 학문적 능력은 여기서 검증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하여 자신의 학문이 어느 정도 완성된 이후에도 2품 이상의 벼슬로서 고문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 차례로 참시(參侍)케 하고 그 칭호를 `특진관(特進官)\'이라 하였다.
성종대왕 - 유교윤리 확립 (2)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이 후 성종은 자신이 수학한 유교 이념의 실천을 위한 사회 구조 조정을 시도하였다. 그 기반은 사류의 양성, 과거제의 개편, 삼강행실을 통한 유교 윤리의 보급, 가묘의 보급, 학전(學田)지급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여 유교 정치 문화를 지도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홍문관을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가운데 사류의 양성은 성리학의 기본지침서로 설명되고 있는 <소학(小學)>의 읽기를 사부학당과 향교에 권장하여 그 기초를 건실하게 하였다. 학문진작을 위해 무더운 여름철에 휴가를 주면서 독서를 하게끔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운영과 용산강(龍山江) 부근의 시원하면서도 경치가 수려한 곳에 독서당(讀書堂)을 지어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학교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경기 · 강원 · 충청 · 전라도의 향교 및 성균관 등에 학전(學田)을 지급한 것 등은 그 실질적인 조처라고 할 수 있다.
1475년(성종 6) 성균관에 존경각(尊敬閣)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하였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충실히 하여 학문연구를 후원한 것도 이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성종 초기에 이루어진 홍문관(弘文館)의 제도 개편 1478년(성종 9)은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 기능의 계승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홍문관의 명칭은 이미 1463년(세조 9)에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장서각(藏書閣)이름을 바꾼 데서 나타난다. 그러나 학술적인 관부이면서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기관이 되는 것은 성종 9년의 일이었다.
그 과정은 세종 · 문종 때의 집현전과 세조 때의 예문관 운영의 맥을 이어서 이루어졌는데 일단은 예문관에 집현전의 기능을 더하는 과정에서 예문관 분관이 대두되었고 3월에 집현전의 직제를 홍문관으로 이양하여 성립되었던 것이다. 청요직(淸要職)이자 경연관을 겸하는 왕의 근신이며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그 역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성종조 이후의 학문과 문화 사업은 세종조의 집현전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홍문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역할에 대한 평가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반민과 사대부의 유교문화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 동안 고려말부터 끊임없이 논란되었던 가묘(家廟)와 정실(淨室)의 설립 여부를 규찰하였다. 특히 정실은 나라의 대제(大祭) 때 서계(誓戒)를 받고 산재(散齋) 중에 있는 사람이 이곳에서 유숙하여 가며 제일(祭日)을 기다리게 한 곳을 말한다. 유교의 예제가 제례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이 가묘와 정실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세종때까지도 가묘의 설립 등과 관련하여 크게 확산되지 않았으나 성종조에 이르면서 가묘는 양반 사대부로서 반드시 갖추고 신위를 보존하고 제례를 행하는 신성한 장소로서 인식 되었던 것이다. 왕은 일반 백성들도 천륜을 알고 충과 효를 행하며 예를 알도록 하기 위해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행하여야 할 인륜지도를 쉽게 풀이하여 기록한 <삼강행실>을 간행 보급하였다.
김종직 등 사림을 등용하여 이후 조선 정치사 및 사상사에 있어 큰 획을 제공한 이른바 사림 정치 혹은 도학 정치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림들이 그 사상적 기초로 여긴 것은 정치 철학의 문제였다. 지나친 예제의 운영을 고집한다기보다는 현실의 정치를 성군의 정치와 천리에 맞도록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깨끗한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사림들은 `수기(修己)\'의 단계에서 `치인(治人)\'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있게 되었다. 또한 이들의 지위 역시 언론(言論)을 맡는 홍문관 및 언관(言官)에 분포되어 있어 아직은 정치 세력으로서의 움직임은 미약하였으나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史草)사건, 문종비(文宗妃)이며 단종(端宗)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복위(昭陵復位) 주장, 부패한 훈구 정치 세력에 대한 비판은 많은 시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종은 왕실 및 즉위의 정통성에 대한 논의를 꺼려했다.
성종대왕 - 유교윤리 확립 (3)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또한 교육의 기초 단위인 향교의 운영을 위해 학전(學田)을 지급한 것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성종은 향교의 실질적 교사인 훈도(訓導)의 임기를 30개월로 정함으로써 잦은 이동으로 인해 교육이 충실화되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와 함께 각 지역에 대한 유교 경전의 보급도 또한 향교교육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영안도(함경도)에 사서와 <소학(小學)> · <효경(孝經)> 등을 보낸다거나(1481. 2)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을 위해 <언문삼강행실(諺文三綱行實)> · <열녀도(烈女圖)>를 간행(1481. 3)한 것은 바로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성종 자신의 수학(修學)과 권학(勸學) 및 유교윤리의 보급은 성종 당대 뿐만 아니라 전란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임진왜란까지의 근 100여 년간의 질서를 공고히 하는데 밑바탕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그 동안 사화라든가 연산군의 실정, 인종 · 명종 때 정치적 혼란 등이 있었지만 조선의 사회 질서를 안정시킨 유교 윤리의 보급이라는 의의는 지극히 큰 것이었다. 또한 법전의 편찬 등 역시 인륜을 알고 수치(羞恥)를 아는데서 비롯된다고 할 때 그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교 윤리의 보급과 실천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성종이었지만 그 동안 조선 왕실이 불교에 대해 가졌던 신앙적 입장은 그대로 유지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집현전과 과거를 통해 유학 특히 성리학을 수학한 이들이 정치세력 전반에 포진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변화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세종조나 세조조에 있어서 유신(儒臣)들은 끊임없이 왕실 불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여왔다.
성종조에 이르러 불교 배척의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데에는 성리학의 심화와 함께 성종 개인의 기호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여진다. 즉 전대(前代)나 자신의 대에 있어서 스스로가 관련된 인간적 고통이나 정치적 희생 등을 강요하는 일이 적었다는 사실은 성종이 불교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 적극적이지 않게 되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신앙이라는 문제가 혼란기를 통해 더욱 깊어진다는 기본적 이해를 염두에 둘 때 성종 때는 특히 사회적 안정을 보였던 시기라는 점도 이의 한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종조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불교 사원 및 승려 등에 대한 일련의 정책은 성종의 억불면을 나타내준다.
먼저 1471년(성종 2) 6월에 도성 안에 있던 염불소(念佛所)를 금지하여 불교의 포교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1461년(세조 7) 6월에 설치되어 수많은 불경을 간행하였던 간경도감(刊經都監)이 1471년(성종 2) 12월에 혁파되었다. 4년 8월 사족(士族)의 부녀자가 출가하여 유풍(儒風)을 어지럽히는 것을 금하였으며, 이와 함께 6년 5월에는 도성 안의 비구니 절을 헐어버리게 하였다. 또한 1477년(성종 8) 3월에는 새로 사찰을 창건하는 일을 엄격히 금지함으로써 사찰에 대한 직접적인 억제를 가하였다.
성종대왕 - 유교윤리 확립 (4)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승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입장은 마찬가지였는데 이를 억승책(抑僧策)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조선의 승려에 대한 정책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는 기본 정책에 입각하였고 이에 따라 양반이나 일반민이 출가하는 것을 막고 승려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도첩제를 시행하였다. 승려의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도첩제(度牒制)는 군역 등을 피할 수 있는 증명서와 마찬가지였다. 유신(儒臣)들의 입장으로서는 이 제도의 운영조차도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예 불교 사원을 근절시키고 승려도 없앰으로써 불교 신앙의 금지론까지 거론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군주로서도 이에 공감하는 면이 있어 다양한 억불정책을 시행하기는 하였지만 군주 스스로가 불교 신앙에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왕실 불교라는 특수한 범주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성종 초기에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친불교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남으로써 한때 완화되기도 하였지만 성종이 친정을 하기 시작하는 7년 10월 군안(軍案)을 작성하는 기간에는 도승을 허가하지 않도록 하는 한편 각 도 관찰사들에게 도첩이 없는 자들을 색출하여 군역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왕실 관련 공사로서 춘궁(春宮)이나 창경궁(昌慶宮)의 수축에 많은 수의 승려들을 동원하면서 이들에 대한 위로의 차원으로서 도첩을 발급하기도 하였다. 성종 치세 말기에 이르러서 억승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1492년(성종 23) 2월에 예조에서 올린 `금승절목(禁僧節目)\'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내용은 먼저 예조에서 지급한 첩(牒)이 있어야 하며 시험으로 취재(取才)한 승려는 예조에서 다시 강경(講經)을 실시하고, 선시(選試)할 때 대강(代講)하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과 관리는 도첩이 없는 자들을 쇄출(刷出)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성종은 군정(軍丁)의 부족을 들면서 도첩제를 정지시키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군정으로 충당시키도록 하였고, 이 후 명종 때 도승제(度僧制)가 부활될 때까지 도첩제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성종대왕 - <경국대전> 완성과 법치.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경국대전> 완성과 법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념을 덕치(德治)로 하는 유교정치 이념은 모든 신민을 교화(敎化)하여 직업에 안착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덕치는 사실상 소규모의 지역과 신민들을 상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국가 규모가 커지고 행정적 처리 사항이 많아질 때 사실상 이러한 덕치를 직접적으로 펴 나가기란 힘들다고 하겠다.
즉 다양한 행동 유형을 가진 인간을 통제하려고 할 때 그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 그것을 규제하거나 교화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방치하여 놓는다면 혼란과 약탈, 방화, 강도 등의 일들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통제불능 내지는 통제하기가 사실상 어려울 때의 방법론,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교육, 행정 등을 통한 규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더욱 관습 내지 성문화시켜 그 틀을 정하는 것이 법이다. 율령(律令)은 치도(治道)의 근본으로서 천하만민의 뜻에 맞으면서도 이해관계를 공평히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율령의 제정은 이러한 관계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당해 시기에서는 그 법률의 적용이 타당하였으나 시간이 흐른 뒤 오히려 그 법률로 인하여 피해를 볼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혹은 법을 지능적으로 이용하여 이득을 챙기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성종대왕 - <경국대전> 완성과 법치. (2)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이러한 법의 운영에 대해 조선은 이미 개국초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 <경제육전(經濟六典)> · <대명률(大明律)>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이면서 운영의 전체 틀을 규정할 수 있는 법이 계속적으로 요구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도된 것이 바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이었다. 역대의 법전과 법령, 중국의 법전 등을 두루 참고하면서 현실에 맞는 내용을 갖춘 만세지법의 창출을 의도한 것이었다. 세조조에 만세성법(萬世成法)을 이룩하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두고 고법(古法)과 현행법 등을 모두 참조하여 만든 1466년(세조 12)의 <병술대전(丙戌大典)>은 그 첫 완성이었다. 이 후 반행(頒行)이 보류되다가 다시 1469년(예종 원년)에 병술대전의 체제 및 내용을 검토하여 수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기축대전(己丑大典)>으로 6전체제가 완비된 통일법전으로 법적 효력을 가진 최초의 <경국대전>이었으나 예종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종이 다시금 세조조와 예종조에 편찬 시행하려 했던 <경국대전>의 반행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471년(성종 2)의 <신묘대전(辛卯大典)>과 1474년(성종 5)의 `갑오대전(甲午大典)\'의 편찬과 수정은 당시 성종과 조정이 얼마나 대전의 편찬에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법전의 수정 보완의 작업은 장기간의 시간이 요구된다. 얼마 만큼의 노력이 들어가 있는가와는 별도로 합리성과 상식의 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성종은 일단 5년 7월에 <갑오대전>을 간행토록 하였고, 이와 더불어 대전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 72개 조문은 속록(續錄)을 만들어 보충하였다. 이러한 시정은 이미 시행할 필요가 있음을 당연히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마침내 1481년(성종 12) 9월 재검토의 필요가 요구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종은 이를 위해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여 대전과 속록을 개수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여 쉽게 결정되지 않았는데 그 바탕에는 새로운 법제정이라는 측면과 고법과 현행법을 정리하는 수준에서의 제정이라는 양측의 대립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 때 성종은 신법의 제정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로서 결국 결론을 내기란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한 뒤 “대전은 법을 새로 내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수교와 속록의 조문을 옮겨 실을 뿐이다.”라고 하여 여러 논의를 일축함으로써 대전의 수정편찬에 한층 추진력을 붙이도록 하였다. 마침내 1484년(성종 15) 12월 4일 모든 정리가 일단락되었고 성종은 예조에 전지를 내려 “새로이 감교한 대전을 을사년(1485년) 정월 초 1일부터 행용토록 하라”라고 함으로써 <경국대전>의 편찬과 관련된 모든 사업을 마칠 수 있었다.
육전(六典)체제로서 이 · 호 · 예 · 병 · 형 · 공(吏戶禮兵刑工)으로 나누어 각 전의 내용들을 상세히 다룸으로써 <주례(周禮)>에서의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체제와 어울리면서도 조선의 현실에 있어서의 다루어야 하는 부분들을 나누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