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대왕 -  불경(佛經) 언해와 의서, 잠서의 간행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불경(佛經) 언해와 의서, 잠서의 간행

 법전 및 병서의 정리와 더불어 문집류 및 잠서(蠶書), 의서(醫書), 언서(諺書), 불경의 언해 등 편찬 작업과 이에 대한 찬진·간행·반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세조조에 이루어지는 불경의 간행과 언해 등의 편찬을 보면, 세조 자신과 교정청(校正廳)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세조가 특히 불경의 간행에 힘쓰고 있는 것은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 벌어졌던 불미스런 일들과 원죄에 대한 속죄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부처에게 귀의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재위 초기에 벌어진 일련의 반역 사건과 복위 사건 등으로 처형되는 이들은 자신의 혈족들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은 결국 유교의 덕치와 명분 및 의리 정치를 주장하는 것과 배치되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세조로 하여금 불교에 의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세조 3년 6월에는 해인사에서 대장경 50부를 간행하기 위해 각 도에서 종이, 먹을 마련하여 보내도록 명하였으며, 5년 7월에는 <월인석보(月印釋譜)> 간행하였고, 또 6년 10월에는 세조 자신이 직접 <능엄경(楞嚴經)>을 번역하고,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이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10권을 간행하였다. 이듬해 9월에 역시 간경도감에서 <법화경(法華經)>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12월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또 8년 2월에는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금강경(金剛經)> 번역을 명하였고, 4월에 간경도감에서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 ·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 <심경언해(心經諺解)> · <아미타언해(阿彌陀諺解)> 등을 간행하였으며, 세조 재위기간 중 마지막으로 11년 3월에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를 완성하였다.
 이처럼 세조조의 불경의 언해와 간행작업에 있어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세조 자신과 간경도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세조가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농상서와 의서가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생산 활동과 보건에 대한 관심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세조는 특히 잠서(蠶書)의 편찬에 주의하였는데,  5년 1월에 서강(徐岡), 이근(李覲) 등에게 <잠서주해(蠶書註解)> 편찬을 명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이르러 양성지가 새로 만든 <잠서>를 올렸던 것이다. 7년 3월 14일에 세조는 양성지가 올린 것으로 보이는 <잠서>에 대해 최항 등 30여 인에게 이를 언해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실제 잠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한문의 언어 습득 능력이 떨어지는 농민들과 또한 전문 용어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방관 및 담당 관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유용한 서적이었던 것이다.
 의서로서는 5년 9월에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교정, 간행하도록 명한 것을 비롯하여 다시 같은 해 11월 말에 양성지에게 이를 교정하도록 하였다. 또한 세조 자신이 직접 <의약론(醫藥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역대 왕 중에서 의약에 대한 저술을 하기는 세조가 처음인 것으로 보이며, 9년 12월에 이에 대해 주를 달아 간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의학과 관련하여 의원의 취재에도 역시 관심을 기울여 10년 1월에 의원 취재에 쓸 의서를 정하였고, 12년 11월에는 재신들에게 의약과 관련한 서적을 차례로 찬진하도록 명함으로써 민생의 보건과 치료에 성과를 남겼고, 12년 4월에는 서거정에게 <마의서(馬醫書)>의 편찬을 명하여 가축의 질병치료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세조대왕 -  불경(佛經) 언해와 의서, 잠서의 간행 (2)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이밖에도 시문집과 지리, 운서 등에 있어서도 재위 기간 동안 계속해서 연구하고 이를 실용화하거나 간행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특히 왕실과 관련하여 3년 6월에 양성지가 <용비어천도(龍飛御天圖)>를 찬진한 것을 비롯하여 9년 4월에는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의 시문 수집을 명하였다. 그외 세조 자신이 직접 저술한 것으로는 <기정도보(奇正圖譜)>(1459) · <송공자(頌孔子)> 5장(1465) · <주역구결(周易口訣)> 등이 있다.
 세조는 이러한 서적의 연구와 주해, 언해, 구결, 저술 및 간행 등과 더불어 학문 연구를 위한 기본 제도를 구상하여 10년 7월에 양성지 · 임원준(任元濬) 등에게 명하여 천문(天文) · 풍수(風水) · 율려(律呂) · 의학(醫學) · 음양(陰陽) · 사학(史學) · 시학(詩學)의 7학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12년 11월에는 재신들에게 역학(易學), 시문(詩文), 운서(韻書), 자체(字體), 악보(樂譜), 천문(天文), 풍수(風水), 의학(醫藥), 복서(卜筮), 농상(農桑), 축목(畜牧) 등에 관한 서적을 차례로 찬진하도록 명함으로써 끊임없이 연구가 이루어졌다.
 
세조의 이러한 의도는 성종조의 융성한 문물 제도를 꽃피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고, 이러한 정책적인 배려 속에서 왕권의 유교적 치도에 따라 문리 방향을 지향하고 이를 위해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가가 장시간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세조대왕 - 사회와 산업 안정을 위한 제도의 개혁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사회와 산업 안정을 위한 제도의 개혁

 가. 호패법의 시행 및 호적의 정리

 세조는 즉위초부터 정치권의 혼란으로 인한 사회의 동요와 산업의 약화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직접 물질적 신체적 피해를 입지 않을 경우 그 이해타산을 깊이 고려하지 않기 마련이다. 세조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특히 강력한 군사력과 더불어 그동안의 세종과 문종의 치세로 인해 농촌 사회 및 지방 사회는 안정을 이뤄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수 있었다.

 중앙 정부를 통치하는데 있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이끌어 나갔지만 지방과 향촌사회도 마찬가지로 다룬다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강력한 정부의 존재 배경에는 높은 생산력과 사회 안정이 필요한데 이것은 곧 부국 강병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룩하는 방법은 고금을 통하여 일치되는 내용이 있다. 즉, 도덕성과 신분 질서의 확립, 조세의 확충, 산업의 장려, 인재의 양성 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 여기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신분 질서의 확립과, 조세의 확충, 산업의 장려에 관련한 세조의 정책이다.
 먼저 신분 질서와 관련하여 세조가 펼쳤던 것은 호패법과 호적의 정리, 공처노비정안(公處奴婢正案)이었다. 조선 사회가 신분제 사회인 만큼 이들에 대한 정리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인구에 대한 정확한 조사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1458년(세조 4) 4월에 호패법의 실시를 명하였고 이듬해 2월까지 준비 기간을 거쳐 그달 초하루에 호패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호패법의 시행은 여러 가지 파급 효과가 있었다. 즉, 이를 발급하는 과정과 발급한 뒤의 운영을 통해 호구의 파악, 유민의 방지, 역(役)의 조달, 신분질서의 확립, 향촌의 안정 유지를 기할 수 있었고 또한 중앙집권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호패법에 대해서는 개국초부터 이미 많은 관심이 두어졌다. 1398년(태조 7) 이래 이의 실시에 대한 논의가 있다가 1413년(태종 13)에 이를 위해 호패사목을 작성하고 실시하였던 점, 그 뒤 여러 차례의 치폐를 거쳤었다. 통치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이의 실시가 이처럼 치폐가 거듭되는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유망이 계속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점, 국역 부담을 피하기 위한 양인은 위조패(僞造牌) · 무패(無牌) · 불개패(不改牌) 등 부정 호패의 문제 등이 심화됨에 따라 호패 폐지론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시행하자는 측과 폐지하자는 측의 대립 상황은 계속되었던 것인데 이미 폐지론이 우수하여 태종 16년(1416) 이후로 호패법은 실시되지 못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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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조의 강력한 호패법 지지 정책추진에 힘입어 호패법의 실시로 인해 파급되는 결과에 주목한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시행을 주장하여 마침내 세조 5년 2월에 호패청을 통한 호패법의 시행을 보게 된다. 즉, 도적 및 백성의 유리를 방지할 수 있고 모든 백성의 신분과 직임을 밝힐 수 있으며, 호구를 장악하여 군정을 확보할 수 있어 국가에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초기의 호패법 실시 배경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 후 8년 10월 10일에는 호패의 체제를 개정하고 이듬해 정월에는 호패의 운영규칙인 호패사목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세조 7년 10월 승니호패법(僧尼號牌法)이 제정되었고, 양인을 천인으로 등재하는 행위인 백문천적(白文賤籍)을 금지하는 것이 세조 11년 11월에 백문사목(白文事目)으로 정해졌다.

 이러한 호패법의 시행과 맞물려 세조는 호구를 조사하여 성적한 호적과 군적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사실 모두 맞물리면서 시행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하나의 조사를 통해 그것을 완성하여 시행한다면 나머지의 시행은 매우 손쉬운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세조는 앞서도 밝힌 바 있지만 군적의 작성을 통해 군정을 완벽히 파악하여 군사력의 양적인 증대에 이바지한 바 있었다. 그것은 곧바로 군체제의 정비와 군비의 확충 등을 통한 강병의 실현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호적과 호구의 파악은 징세원 파악이라는 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국가재정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산업의 안정과 그 제도적 지원이라는 측면이 담보되어야 했고, 세조는 권농의 실시 및 지방 통치 지배 질서와 올바른 정책의 수행이라는 방법을 통해 만들어 나갔다. 그 보완책으로 이미 즉위초에 어사를 팔도에 파견하면서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거나 백성을 침해하는 것에 대해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였다.

 세조 8년 5월에 이르러 완성된 호적과 7년 4월에 완성된 공처노비정안이 바로 이러한 배경과 효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이 임오호적(壬午戶籍)을 만들기 위해 전해인 7년 7월에 지방의 옛 호적 및 군적을 중앙으로 보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특히 공사노비정안의 완성을 통해서는 114관사(官司)에 속하는 총 20수만 명의 공사노비를 확인하고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제도의 확충을 통한 직역 및 세원, 신분의 조사는 세조와 그를 보좌하는 신하들에 의해 입안되고 시행되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국가 재정의 확대로 나타났다.
 단종을 거치면서 자칫 방만하고 혼란스러워질 수 있는 상황, 즉 위기상황이 오히려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작업을 토대로하여 1467년(세조 13) 정월에 양성지가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을 찬진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나. 산업의 안정과 진흥책

 조선 사회의 가장 근간이 되는 산업은 역시 농업이었다. 바로 농업 생산을 통하여 국가와 백성이 모두 유지 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실은 농업을 수호하고 백성의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세조 또한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이를 더욱 구조적으로 농업을 보장하면서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세조조에 이루어진 양전사업(量田事業)이 바로 그 일환이었던 것이다. <경국대전>이 편찬되기 전 이미 20년을 단위로 하여 양전을 실시하여 토지의 소유와 비척 등을 정확히 조사를 하였고, 이를 통해 농민의 안정된 생산력을 확보하려는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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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세종 재위 기간에 이루어진 공법(貢法)의 시행은 바로 이러한 정확한 양전에 힘입은 것이었다. 또 그동안 햇수가 바뀌는 동안 전지(田地)의 비척과 생산량의 변화는 많았다. 이제 세조는 이러한 배경과 또 세원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양전을 해야만 하였다.
 양전의 실시는 먼저 세조 7년에 경기도와 전라도에서 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리고는 같은해 양전사목(量田事目)을 정하였으리라 추정되는데 그것은 사실 세종조의 내용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앞서의 경험은 새로이 실시되는 양전의 어려움을 대폭 감소시켰으리라 여겨진다. 기록과 경험있는 인적 요소의 온존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같은 해에 먼저 경기도에서 양전이 실시되었고, 세조 8년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세조 9년에는 경상도에서 차례로 이루어졌다. 통계 결과가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세종대의 총 양전결수인 1,709,136결과 비슷했다.

 양전 사업과 더불어 세조는 산업 특히 농업의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역대의 제왕들이 행하였던 권농 정책의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농상서(農桑書)의 연구와 반포, 제언과 보의 수리, 개간 장려, 진휼 정책 등이 그 내용이었던 것이다.
 먼저 개간의 장려와 관련하여 세조조에는 여러 가지의 정책이 이루어졌다. 특히 세조 5년 12월에 호조에서 아뢰고 있는 조건(條件)을 보면 생산도구를 소유하고 있는 관료층을 중심으로 논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즉 전지를 개간하여 농업을 일으키기 위해 경작할 만한 진황지를 자원(自願)에 의해 나누어 주도록 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대군 · 제군 · 종친 등의 왕실 구성원과 당상관 · 성중관(成衆官) · 한량인(閑良人) 등의 상하 관료층이었다. 이것은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이었다.

 개간을 위해서는 많은 양의 노동력과 자금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일반 백성들의 경우 개간을 수행하는데는 무리가 따랐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세조는 평안도 · 황해도 · 강원도 지역의 개간할만한 땅을 자원에 의해 그 양을 조절하여 분급하였던 것이다.
 세조는 하삼도의 부실자(富實者) 4,500호를 평안도 · 강원도 · 황해도 지역으로 사민(徙民)시킨다든가, 지역에 둔전을 설치하여 경작케 하는 적극적이고도 실현성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개간지의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세조의 노력은 수우(水牛)의 수입과 양잠의 장려에서 나타났다. 5년 6월에는 호조에 명하여 양잠하는 조건을 갖추어 중외에 반포하도록 하였고, 7년 11월에 일본에서 수우를 들여와 논갈이에 유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서 세조가 더욱 유념하였던 부분은 양잠이었다. 산업의 안정과 더불어 견사(繭絲)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양잠 조건의 반포 시행과 더불어 이를 더욱 뒷받침할 수 있는 연구 기반으로서 잠서(蠶書)를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잠서의 언해도 명하여 실질적으로 지방 농촌 사회에 유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치 · 경제 · 사회 · 군사 등 전부문에 걸쳐 많은 성과를 이룩해 낸 세조였지만 왕조초기의 정치성향과는 차이가 있었다.
 
먼저 세조는 세종 때 문물의 극성기를 살아왔고 자신도 역시 이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방법은 달랐다. 세종의 경우 중재자의 역할을 취하면서 유신들의 노력을 격발하였고 또 자신과 정치관이나 치세의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크게 배척하지는 않았다. 세조는 반대입장의 신료들에 대한 과감한 숙청을 행하였다. 그것은 세조의 즉위 과정과 정통 승계론에 민감한 반응으로 자신의 왕위 승계를 부정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특히 정적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과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자신의 조카이자 상왕이었던 단종 등 많은 이들이 희생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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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조는 자신이 직접 병서, 의서, 악서, 지리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연구 업적을 남겼다. 또한 제도의 개정이나 제정시에는 그의 의도가 반드시 반영되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그 사항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즉 세조의 경우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추진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의도와 다른 경우는 배타적 자세, 억압 하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다양한 의논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여하간 그의 능력이 이에 모자란다면 크나큰 문제의 소지가 생겨 폭군 내지는 전제 군주로 불려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문무의 능력과 치자로서의 정치력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는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이었다.

 다음으로 그동안 세조의 공과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으로서 집현전의 폐지와 경연의 철폐에 대한 것이 있다. 물론 세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과 발생한 정치적 갈등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들과 세조간의 정치 체제에 대한 의견 대립이 그 주요 원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권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학문 및 정책 연구 기관으로서 존재하고 있던 집현전은 세종 말부터 이미 정치세력화 되어갔고, 대체적인 그들의 생각은 <주례>에 입각한 천관총재 및 육관에 의한 통치를 희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현신(賢臣)의 정치에 무게가 실려있던 것이고, 이는 현실적으로 세조왕권과 대립되는 측면이 있었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구상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박팽년 · 이개 · 성삼문 · 하위지 · 류성원 등 집현전 학자들이 왕을 모살하고자 기도한 마당에 더 이상 집현전은 왕을 돕는 연구 기관으로서의 성격은 상실되었다. 세조는 집현전을 폐하고 그 장서들을 예문관으로 옮겨 관리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집현전의 학문 연구 기관은 이후 그 전성의 시기를 다시는 마련하지 못한 채 9년 11월에 장서각을 바꾼 홍문관의 설치 및 운영이나 훨씬 후대인 정조 때의 규장각으로 연결되게 되었다. 집현전의 학문적 성과와 인재의 축적은 세조조와 성종조를 지나면서 많은 부분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상에서 논한 세조의 많은 업적을 정리해 나가다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왕이 구상하고 실천 해 나가는 과정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왕은 당대의 누구보다도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고, 또 많은 인재들이 왕을 보좌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역량은 왕권의 확립, 강력한 왕의 이미지를 창출하는데 집중되었다. 왕권을 가장 근원적인 권력기반으로 하는 전근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왕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수많은 사업은 모두 세조당대에 거의 완성되었다. 세조가 이토록 심신의 고통을 마다하고 추진하였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세조 자신이 수성(守成)형의 군주가 아닌 창업 중흥주임을 자처하였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왕 자신이 새로운 기준으로서의 정책과 제도를 이룩하겠다는 의지였다. 따라서 세조 재위기간 중 이루어졌던 <경국대전>의 편찬노력, <국조보감> · 병서 · 잠서 · 의서 · 지리서 등의 연구 및 간행은 실용주의적 경향을 짙게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세조대왕 - 사회와 산업 안정을 위한 제도의 개혁 (5)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마지막으로 세조가 승하한 뒤 14년 11월 21일에 정해진 시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의 생애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자 한다.

 “…… 공손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 대왕의 지혜로운 결단은 우뢰가 달리는 듯하고, 신령스러운 꾀는 하늘이 주셨습니다. 밝게 장의(仗義)를 기약하시고, 한결같이 군흉을 막았으며, 하늘에 순종하시고 사람들에 응하여 한 나라를 두루 다스리었습니다. 바야흐로 형둔(亨屯)의 시초를 만나서 잘 위정(爲政)하는 법을 넓히었습니다. 농사에 힘쓰시고, 형벌을 밝게 하시며, 군사를 장려하시고 군졸을 훈련하셨습니다. 토포(吐哺)로써 뭇 어진이를 받아들이고, 운수를 획책하여 권세를 제어하시었으며, 전석(前席)을 망라하여 여러 선비를 끌어들이고, 얼굴에 웃음을 띠고 교회(敎誨)하셨습니다. 교린을 하는 데에는 도가 있었고, 사대를 하는 데에는 정성으로써 하셨습니다. 구족(九族)을 서임함에는 인은(仁恩)으로써 하시고, 사문(四門)에 접대하시는 데에는 예와 겸양으로 하셨습니다. 천지를 경위(經緯)하시매, 큰 공덕은 개벽의 기틀을 한가지로 하시었고, 일월이 밝게 비추매 아름다운 조화는 문명의 성함을 빛내었습니다. 일기(一紀) 동안의 태평한 다스림을 생각하니, 천년에 만나기 어려운 아름다움인 줄을 알겠습니다. 이에 근로에 지쳤는데 어렵고 큰 것을 주시니, 부모에 대한 효양의 정성이 어찌 미치겠습니까? 하늘이 다하도록 슬픔이 심히 깊어 이에 순성(純誠)을 다하여 경삭(景찱)을 재양(載揚)하고 삼가 옥책을 받들어 존시를 올리어 이르기를,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라 하고, 묘호를 세조라 합니다. …….”
예종대왕 - 생애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생애

 예종대왕(이하 예종이라 함)은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8대 왕이다. 그의 생애를 보면 생존시에도 그렇지만 사후에도 역시 남다른 무엇이 느껴진다. 그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과 그리고 그가 승하한 뒤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냐의 문제에 있어서 그러함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종의 생애를 살피는데 있어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왕실내부의 인적 구조의 측면과 정치적인 배려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데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본래 세조의 후사는 그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 추존) 이어야 했었다. 그러나 세자로 정해진 지 2년만에 갑작스런 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약관 스물의 나이였다. 또한 그와 소혜왕후 한씨와의 슬하에는 월산대군과 자을산군 두 아들이 남아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의경세자의 생애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죽음은 계유정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있어 아버지로서의 슬픔과 함께 후사문제에 대한 정치적 공백을 여하히 없앨 것인가를 염려하게 하였다. 또한 원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로서 해양대군 즉 예종이 세자에 책봉되고 있는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경세자에 대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슬하에는 의경세자와 해양대군, 의숙공주가 있었고 근빈 박씨로부터는 덕원군과 창원군이 있었다. 의경세자는 세종 21년 9월 15일에 그 동안의 관례를 깨고 궁중에서 태어났다. 본래는 왕자 대군의 경우 자식을 볼 때는 궁 밖에서 낳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희왕후와 세조에 대한 아버지 세종과 모후의 사랑이 지극하여 이렇게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 후 의경세자는 세종 27년 7살의 나이로 정의대부(正義大夫)에 배명되어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졌으며, 1453년(단종 원년) 정월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진계되었고 다시 계유정난 뒤인 10월에는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제배되었다. 이 후 세조 원년 7월 26일에 세자에 책봉되기에 이른다. 빈(嬪)으로는 한확(韓確)의 딸인 소혜왕후 한씨와 소훈 신씨(昭訓 愼氏) · 권씨(權氏) · 윤씨(尹氏)가 있었는데, 다만 소혜왕후로부터 2남 1녀를 얻었을 뿐이었다. 의경세자가 이토록 부인을 일찍이 여럿 두었던 것은 장인인 한확의 조언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세조 3년 9월 2일에 의경세자가 죽었을 때에 원손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성종)의 세수는 매우 적었다.

예종대왕 - 생애 (2)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이러한 상황을 대처하면서 세조는 장자인 의경세자의 뜻밖의 죽음에 당황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강력한 정치력에 의해 정국이 안정을 찾아가는 기세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후사를 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시라도 이를 소홀히 하거나 비워 놓아서는 안되었다.
 그 혈통대로라면 당연히 장자인 월산대군이 세손에 책봉되어 왕자로서의 수업을 시작하여야 했다. 그러나 세조와 정희왕후는 이러한 순서를 밟지않고 차남이었던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조 스스로 어린 군주를 둘러싸고 벌어진 악폐와 혼란을 몸소 겪어봤기 때문에 이를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여러 대신들도 둘째인 해양대군을 추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점도 참작되었다.

 마침내 세조는 이러한 정황을 염두에 두면서 3년 11월 10일에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정하게 된다. 이 때 해양대군의 나이가 아흡이고 세조는 불혹을 갓 넘긴 상태였다. 세조 자신의 건강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자신이 군국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세자의 왕자 수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한다면 결코 다른 일은 벌어질 리가 없었다. 어쨌든 해양대군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자에 책봉되어 세조의 승하 후 즉위한 예종인 것이다.
 그러면 다시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기 전의 생애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예종은 세종 32년인 경오년 정월 초하루에 사저에서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왕실은 세조의 부왕인 세종의 병환이 차도가 없는 관계로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또 형인 문종도 정사를 돌보랴 세종의 병간호를 몸소하랴 해서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이러한 차에 자식을 보게 되었으니 세조는 그 기쁨을 감출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조용히 차남의 탄생을 자축할 뿐이었고 부인 윤씨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세종의 붕어와 연이은 문종의 병환 등으로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좀 허약하긴 하였으나 잘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열살 이상의 나이차가 있는 형 도원군(의경세자)의 우애도 작용했던 듯하다.

 단종의 재위기간에는 조선 개국이래 최대의 위기라 할 정도로 권력의 향방을 둘러싼 암투가 치열했다. 특히 세조는 단종의 큰 숙부로서 종친의 우두머리였던 관계로 그의 행보 하나 하나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조는 정치적 혼란기를 바로잡으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가 1455년 윤6월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예종은 형 도원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뒤 세조 원년 8월 19일에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봉해졌다.

 해양대군(예종)은 당시의 유아(幼兒)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창진(瘡疹) 즉 홍역을 앓게 된다. 세조 2년 5월 3일의 일이었다. 지금이야 별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큰 질병 중의 하나였다. 해양대군이 창진을 앓자 세조는 아버지로서의 아픔과 함께 걱정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세자의 몸도 좋지 못한 상황은 세조에게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조는 해양대군의 창진에 대해 더욱 신경이 쓰이었다. 이 때 세조가 해양대군을 위하여 조치하고 있는 다음의 내용을 보게 되면 그 절실함이 보인다.


예종대왕 - 생애 (3)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세조 2년 5월 3일 예조에 전지(傅旨)하길, “경연 · 윤대 · 상참 · 조계 등의 일을 지금 잠깐 정지하겠다.” 하였으니, 해양대군이 바야흐로 창진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대궐 안의 여러 곳에 명령하여 세속에서 창진 때 꺼리는 것을 일체 금단하게 하고 오늘부터 어선(御膳)은 소금에 절인 채소만을 올리게 하라.”고 명하여 어주(御廚)를 중궁으로 옮기게 하였다.
 세조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해양대군의 병세는 큰 차도가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한 해를넘긴 3년 5월 초에 이르러서야 그 병이 낫게 된다. 이 때 세조의 기쁨은 굉장히 컸다. 일본국의 사신이 와서 이들 및 좌부승지(左副承旨) 한계미(韓繼美)와 좌찬성 신숙주 등의 대신들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에서 무과를 시험하려는 중이었는데 해양대군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어가를 돌려 돌아온 것이다. 그 기쁨이 이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조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장자로서 그 동안 자신을 보좌해왔고 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미더운 모습을 보여줬던 세자가 세조 3년 9월 2일 갑작스레 세상을 뜬 것이다. 특히 자식을 많이 두지 않았던 세조인지라 아들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그러나 수많은 인맥을 관리하고 거사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세자 장(暲)의 죽음은 아직까지 단종복위의 움직임이 있던 때인 만큼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즉각적인 조치 즉 건저(建儲)를 바로 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해양대군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다만 아직 몸을 추스려야하는 때였고, 또 형의 죽음으로 혹 불상사가 이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만사를 조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조는 세자가 죽은 바로 다음날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렸다.
 즉, 해양대군 및 원손에게 명하여 처소를 피하게 하고 공궤(供饋)는 전과 같이 하되 사옹방(司甕房)의 선수(膳羞)를 쓰지 말도록 하였다. 이때 해양대군의 나이는 아홉이었고, 원손인 월산대군은 넷이었으며 자을산군 곧 성종은 세조 2년 7월 30일에 태어나 강보에 싸인 아기일 뿐이었다.

 세조는 많은 것을 고려해야만 하였다. 자신의 피와 땀으로 세운 작금의 조정을 잘못 정해진 후사로 인하여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단계를 밟으면서 기반을 튼튼하게 하여야 했다. 세조와 정희왕후 그리고 공신들 및 대신들의 중론은 거의 일치했다.
 왕위 계승의 서열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뒷전에 있던 해양대군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먼저 세조는 11월 7일 해양대군의 관례를 올렸다. 이것은 실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즉, 세조 3년 11월 7일 형조에 전지하기를, “해양대군의 관례를 행하였으니, 11월 초 간통과 도둑을 제외한 유형(流刑) 이하의 죄는 모두 용서하여 면죄하라.” 하였다.

 관례(冠禮)를 올린 후 곧바로 조정에서는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중지를 보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청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해양대군이 관례를 올린 지 사흘이 지나고 곧바로 11월 10일 이조판서 한명회와 예조참판 구치관을 명나라에 보내어 해양대군을 세자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제 해양대군은 철저한 보호가 따르게 되고 군왕으로서의 치도와 덕, 학문을 익히게 되었다.